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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Apr 12. 2020

당신은 어떤 퇴근길을 걷고 있나요?

매일의 퇴근길 기록

직장인들에게 아마 가장 설레는 단어가 있다면 '퇴근길'이 아닐까요? 퇴근은 언제나 좋지만, 퇴근길에는 꽤 다양한 감정들이 함께합니다. 어떤 날은 날아갈 듯 즐겁고, 어떤 날은 씁쓸하고, 어떤 날은 무미건조하고, 어떤 날은 피곤해 축 늘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전 평소 타던 버스나 지하철 대신 걷는 것을 선택합니다.






사뿐사뿐,

회사 문밖을 나섰더니 노르스름한 노을빛이 나를 맞이해줄 때, 아직 밝은 하늘을 마주했을 때 저는 괜스레 신이 납니다. 귀에 얼른 이어폰을 꽂고선 선곡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신나는 아이돌 노래가 좋겠네요. 신나는 리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푸르른 잎을 잔뜩 펼치고 있는 나무들, 점점 농익어가는 붉은 노을빛, 그 사이를 가로질러 나를 기분 좋게 스치는 바람, 주위의 모든 것들에 감각을 세우고 음미하다 보면,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지요. 저는 이런 퇴근길의 즐거운 여유를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날씨 좋은 날엔 꼭 들리는 곳:-)






뚜벅뚜벅,

생각이 복잡할 땐, 길을 걸으며 꼬인 실을 찬찬히 풀어봅니다. 보통 잔잔했던 호수에 돌이 던져지면 생각도 같이 꼬이더군요. 어떤 날엔 누군가가 던진 말 한마디로 마음이 꼬여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그날만은 제가 그 개구리가 된 느낌이었죠. 말 한마디로 의욕 상실, 전의 상실했던 날이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무방비 상태였던 저에게 누군가 새로운 일 뭉텅이를 던져 파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때론 왜 파동이 생겼는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파동이 생기면 제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합니다.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고 올라갈수록 감정도 함께 올라갔다 갑자기 훅 떨어지고, 일은 하고 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죠. 특히 퇴근 시간이 지나면 더더욱이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괜히 뒤숭숭하고 일도 손에 안 잡히는 날엔 그냥 노트북을 덮어두고 무작정 일어납니다. 그리고 뚜벅뚜벅 길을 걸으면서 과연 어떤 순간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오르내렸는지 곰곰이 곱씹어봅니다. 그 말이, 그 순간이 왜 그렇게 크게 나에게 다가왔는지 살펴보고 있노라면, 복잡하게 꼬였던 감정들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노트북을 덮고 무작정 일어났지만, 쉽사리 놓고 나오진 못한 1인



계속해서 살펴보아도 풀리지 않을 때는 좋아하는 베이커리에 들려 빵을 삽니다. 입 안 가득 탄수화물로 채우고 우적우적 씹으며 무작정 속을 채웁니다. 어떨 때는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한 캔을 삽니다. 홀짝홀짝 마시며 복잡했던 마음을 같이 넘겨버리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저만의 방식입니다. 답을 찾을 때도, 찾을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건 먹을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듯,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엉킨 마음들을 애써 뒤로한 채, 저는 뚜벅뚜벅 집으로 향합니다.

빵과 맥주로 되찾는 이너피스:-)






터덜터덜,

그저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환기가 필요한 날엔 그냥 길을 나섭니다. 그 날은 말 한마디가 툭 떨어져서 마음 한 켠에 구멍이 났던 날이었습니다. 구멍 틈새로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방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남은 빈 공간은 허탈한 웃음과 지친 눈물로 금세 차올랐습니다.


배터리 10%의 상태로 회사를 오갔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겨우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배터리를 충전하고는 회사에서 있는 힘껏 다 써버렸죠. 회사에서는 그 10%의 배터리로 출근과 동시에 쉴 새 없이 달렸습니다. 마치 경주마처럼요. 그럼에도 일이 끝나지 않아 야근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그렇게 1% 남짓의 배터리만 남긴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면 저는 매일 밤 방전이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10%의 배터리로 근근히 매일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팀장님의 말 한마디가 제 마음에 구멍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일이 많아서 요즘 정신없는 것 알지만, 그래도 이거는 챙겼어야지! 이거 안 챙기고 뭐 했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지막 남은 기타 줄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눈물이 아닌, 웃음이 나더군요. 분명히 나한테 하는 말인데, 나한테 하는 말 같지 않게 느껴지는 팀장님의 말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그렇게 회의를 이상하게 끝마치고서 저는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내 능력 이상으로 힘을 내고 있는데,

저는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를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생각들을 하며 멍하니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제 책임이 맞지만, 최선을 다했는데도 할 수 없었던 건 제 잘못이 아니겠지요. 최선을 다하는 건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소진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지켜내는 것 역시 내 책임이겠지요. 터덜터덜 지친 걸음을 내디디며, 토닥토닥 나를 다독입니다.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샌가 발이 욱신욱신 아파왔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새로운 감정에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는 주인을 만난 불쌍한 발엔 어느샌가 굳은살이 자리했네요. 요 근래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은 종종 또 있겠죠? 이런 순간들이 쌓여 어떤 말들도, 일들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굳은살이 박이는 거겠죠? 아직 굳은살이 자리하지 않은 초보 직장인은 쓰린 상처를 안고 오늘도 퇴근길을 걸어갑니다.



+++

오늘, 당신은 어떤 퇴근길을 걷고 있나요?

어떤 걸음이던 간에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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