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
학교 뒷산을 오르다가 작은 밤을 하나 주웠다.
밤을 잘 먹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 앞으로 똑 떨어져 도로로 굴러가는 알밤이 귀여워 주워 들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엔 뒷산을 정비해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는데 가을에 접어든 산책로는 참 예쁘지만 아무도 찾지않아 쓸쓸하다.
처음 정비했을 때 깔아 둔 파쇄석과 야자매트 위엔 여기저기 잡풀들이 나 있었고, 설치해 둔 정자와 의자는 사람이 앉지 못할 수준으로 시간과 자연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았다.
예전엔 도토리(하늘나라 간 반려견)와 다녔고 도토리가 하늘나라에 가고 나서는 아이들과 다녔는데 아이들은 이제 산책보다는 게임이 더 좋은 나이가 되어 같이 산책을 가자는 제안을 쿨하게 거절을 하고 자기들 방으로 쏙 들어 가버려 혼자 나오게 된 산책 길.
봄까지 찾아오다가 여름에 들어서면 벌레들이 너무 많아 한동안 못 오다가 오랜만에 오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뒷산 오르는 길에서 이리저리 발에 차이는 도토리와 밤을 주우며 가다 보면 어느새 주머니 한가득 모아져서 다람쥐처럼 주머니를 볼록하게 하고 서 있는 내가 숲 한가운데 있다.
앉으면 분명 엉덩이에 흙먼지와 나무 찌꺼기들이 묻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냥 설치된 의자에 앉아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주머니의 도토리와 밤들을 조무락 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정자에 올라 대자로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누워서 음악을 듣다가 눈을 떴는데 대각으로 정자 지붕의 끝과 나뭇가지와 파란 하늘이 조화롭게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쏴아아 소리를 내는 나무들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박자에 맞춰 주머니의 도토리와 밤을 조무락 거렸다.
톡 톡 탁탁 토독토독 쓰윽쓰윽
시간이 이대로 오래는 말고 잠깐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이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었다.
꼭대기 집에 살았을 때 짓다 만 교회당 건물 뒤쪽 클로버가 가득했던 풀밭 위에 보자기를 깔고 누워서 하늘을 보던 그때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을바람은 햇빛과 함께하면 시원하고 청량하지만 변덕스러운 햇빛이 구름 뒤에 숨었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약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프스스 일어나 옷을 털고 정자에서 내려오다가 맞은편 느티나무에서 바람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낙엽들을 정자 계단 1열에 앉아 한참 쳐다보았다.
봄과 여름, 가을을 보내고 쉬러 땅으로 내려오는 요정들처럼 낙엽들은 예쁘게 땅 위로 내려앉아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문득 도토리가 떨어지는 낙엽들을 잡겠다고 우다다 뛰어들던 모습이 환영처럼 겹쳐온다.
집에 가야지...
주머니에 있던 길쭉하고 동그랗고 납작한 귀여운 밤과 도토리들을 정자 계단에 잘 모아 두고 다음에 왔을 때 다람쥐나 청설모들이 몇 개나 가지고 갔는지 세어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무작정 나온 산책길이었는데 나 빼고 도토리도 밤도 나무도 낙엽도 바람도 모두 열심히 익어가고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도 열심히 익어가며 움직이고 살아가야지.
소소한 소망들을 예쁘게 엮어 마음에 담고 뒷산에서 내려왔다.
다음번에 갈 땐 책을 한 권 가지고 가서 예쁜 낙엽을 책 사이에 끼워 납치해 와야겠다는 계획을 알차게 세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