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na, Day 18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

by 그냥 하자
20251004_151934.jpg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오늘은 아내와 둥이와 함께 알베르티나를 다시 다녀왔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다. 특히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피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에드가 드가(Edgar Degas),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에곤 실레(Egon Schiele),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등 쟁쟁한 작가들의 유명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500년대에 그린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까지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그리고 여기는 특이하게 AR, 즉 증강현실을 통해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것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드가의 '춤추는 두 명의 무희들(Two dancers)' 작품이 있는데, 액자 왼쪽 하단의 QR코드를 스캔하고 카메라를 작품으로 향하면 드가가 무용수들을 스케치하는 장면이 그려지고 그 두 명의 댄서가 아름답게 춤추는 영상이 스마트폰의 카메라 속에서 펼쳐진다. 그런 작품들이 적어도 10개는 있었는데, 기술의 발달로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렇게 명작들이 즐비한 가운데 오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평소에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독일의 어느 여성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이고, 작품의 이름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Woman with Dead Child)'이다.


이 작품은 현재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는 'Gothic Modern'의 작품들 중 하나로서 피에타Pieta 같은 작품들과 같은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제일 유명한데,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겨 있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가톨릭 예술의 주요 모티프 중 하나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연민', '경외'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케테 콜비츠는 이 작품을 1903년, 아들 페터가 7살일 때 그 애를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동판화(동판에 바늘 등 날카로운 물체로 파서 만든 작품)로 만든 작품이다. 동판화 특유의 거친 표현으로 성스럽게 느껴지는 일반적인 르네상스 피에타들과는 다르게, 자식을 잃은 고통에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우리네 엄마의 모습을 본 감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케테 콜비츠 작품 속의 엄마는 늙어 보인다. 머리는 듬성듬성 빠져있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온몸으로 죽은 아이를 열렬히 끌어안고 있다. 마치 죽음에서 끄집어 올리기라고 하는 것처럼. 엄마의 손과 발은 크고 거칠다. 흡사 동물처럼 보인다. 아내는 나중에 '처음에는 침팬지가 아이를 안고 있는 것 같아 보였어. 근데도 그 슬픔이 느껴지더라.'라고 했다. 죽은 아이는 힘 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고 엄마는 얼굴을 아이의 몸에 파묻고 오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극한의 고통에 절규하는 인간이 보이고 그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슬프게도 저 작품은 케테 콜비츠의 개인사와 겹쳐진다. 작품의 모델이었던 페터는 1차 세계대전에서 어린 나이로 전사하게 되고, 케테 콜비츠는 이 '현대적 피에타'를 평생 변주하며 만들게 된다.


문득 감상에 빠져든다. 또 나에게로 수렴한다. 내 자식이 죽는다면. 한참을 키보드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는데,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내가 '자식'인 나의 부모님은. 자식이 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떨지. 근래로 우리나라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가 있었다.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죽었는데, 그들의 부모들은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갈까. 부모가 자식을 잃었을 때를 우리 표현으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 내장이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은 '통증 척도(0~10)'상 최고 등급인 10단계라고 한다. 그런 고통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니, 끔찍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겐 분명한 현실이 아닌가. 우리네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무한한 사랑을 일컫는 말이다. 자식보다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의 순리라 볼 수 있다.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숙명으로서 우리 인간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데,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우리 문화권에서도 서양 문화권에서도 자식의 죽음을 설명하는 단어 자체가 명명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내리사랑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같은 절망일 것이다.


몇 달 전,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모실 곳을 직접 가 보고 계약을 하고 왔다. 상상하기 싫은 미래지만, 또 한편으로 잘 대비해야 하는, 확정적으로 다가올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 미래만 해도 상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런데 만약 그 대상이 지금 내 곁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이 작은 생명체라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정말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 같다. 내가 비록 현실적인 인간이고 창의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지만, 정말 그것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미래일 것이다.


내일 막간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또 저 그림을 보러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부모님께 연락 한번 드리고, 아직 말도 못 하고 울기 밖에 못하지만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는 내 옆에 있는 이 작은 생명체를 더 꼭 안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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