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
오늘은 아주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즐거웠다. 이것 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감사한 날이다.
어제 오전에는 내가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고, 오늘은 아내가 자유시간을 가졌고, 쇼핑을 하러 다녀왔다. 나는 나 혼자 미술관을 돌며 그림을 보고 왔는데, 아내는 그 시간을 우리 가족을 위해 투자했다. 자기 옷보다도 내가 추울까 봐 얇은 패딩을 샀고, 둥이를 위한 두꺼운 옷, 마지막으로 본인을 위한 목도리와 모자를 샀다. 아내 덕분에 우리 가족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초겨울 같은 비엔나의 날씨를 가뿐히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채비를 갖추고, 아내가 찾아본 커피숍으로 향했다. Cafe Glas. 마리아힐퍼 거리 인근에 있는 카페인데, 내부 인테리어도 센스 있고 무엇보다도 커피가 맛있었다. 나는 커피를 잘 알지는 못한다. 맛있는 커피와 그냥 '커피'인 커피. 이렇게 겨우 나눌 수 밖에 없는 둔감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데, 일단 여기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구글지도 리뷰에서 극찬을 받은 콜드브루 한잔과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켰는데, 그중 콜드브루가 정말 좋았다. 살짝 오렌지의 향긋한 과일향과 신맛이 쌉싸리하게 올라오면서 고소한 커피 향이 부드럽게 깔린다. 아내도 나도 이제껏 마셔본 콜드브루 중에서 제일 맛있다고 평가했다. 이 정도가 나의 미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최대치인데, 구글지도 리뷰 4.9점과 커피 맛에 대한 수많은 칭찬 후기들로도 퀄리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페에서 본 흥미로웠던 풍경 하나가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가게는 만석이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큰 테이블에 있는 4명은 단체가 아니라 2명, 2명이 따로 온 일행들이었고 그냥 자리가 부족하니 같이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여기는 그냥 의자만 남아 있으면 편하게 합석을 하고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로 보였다. 이윽고 우리 옆자리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나서 나갔고, 직원은 계속 커피를 만들고 서빙하느라 그 자리를 치우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바로 뒤에 들어와서 커피를 주문했던 젊은 여자 한 명이 커피를 들고 자리를 찾으려고 바깥으로 나갔는데 자리가 없었고, 다시 들어와 애매하게 서 있자, 그 뒤에 기다리던 젊은 남자 한 명이 우리 테이블 옆자리에 앉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독일어로 이야기를 했으므로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의 제스처와 분위기,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자리에 앉고 마침 다른 직원이 그 테이블에 있던 잔들을 정리하고 간다. 그런데 그때, 방금 그 여자에게 저 자리에 앉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던 그 젊은 남자 손님이, '나 여기 앉아도 되겠어?'라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건넸고, 그 여자는 '응 당연하지'라는 투로 대답을 했다. 처음에는 그저 합석해서 자기 커피를 마시는가 싶더니, 이내 그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다. 여기서부터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분명히 생전 처음 보는 관계로 보이던 남녀가 카페에서 합석해서 테이블에 앉고 어떤 식으로 접점을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대화의 물꼬를 튼 이후에는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여자가 먼저 자리를 떴다.
바로 옆자리에서 펼쳐지는 작은 에피소드가 흥미로웠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비포 선라이즈'의 인트로 씬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여자가 먼저 자리를 떴고 남겨진 남자는 혼자 커피를 홀짝이는 결말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영화 같은 장면이 자연스레 펼쳐지는 것은 이곳이 '빈'이어서?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여서? 그냥 젊은 청춘이어서? 정답은 없고, 정답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작업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젊은 빈의 청춘에게 마음속으로 무운을 빌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맛난 커피를 마시고는 다시 마리아힐퍼 쇼핑거리로 나와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큰 쇼핑매장 안에서 둥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이것저것 다양한 샵들을 둘러보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만끽했다. 들어오기 전에 나는 서점을 찾아서 한참 동안 구경을 했다. 규모가 꽤 큰 곳이어서, 영어로 된 섹션도 잘 갖춰져 있어서 그나마 이것저것 뒤적여 볼 수 있었다.
둥이의 컨디션을 고려해서 들어와야 했기에 아쉽게도 우리가 가보려고 찜해놨던 맛있는 만두가게를 들르지 못하고 왔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