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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똥을 길똥이라 부를 수 없는

by justit May 09. 2024

1. 모두가 홍길동인 데...

홍길동이란 이름은 보편적이다. 어디에서 보든, 그는 누구나 아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작성하실 때는 '주소, 전화번호, 직업, 연령, 성명 홍길동'하는 식으로 기재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인적사항 중에 홍길동은 모두 같다. 그러면 정작 차이라는 건, 주체의 이름을 제외한 것에 불과하다. 주소, 전화번호, 연령 따위가 다른 이와 식별하는 코드로 작동하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홍길동으로 수렴한다. '어디에 사는 홍길동 씨, 나이가 얼마인 홍길동 씨...' 하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홍길동을 특정하는 것에 딸리는 요소들은 다시금 홍길동을 삭제하는 주된 것처럼 기능한다. 주체가 텅 빈 것이라더니, 정작 요란해 보이는 그것은 숫자, 장소, 직업 등으로 비로소 '그건 접니다.'라는 꼴이 된다. 홍길동은 모두의 이름이지만, 아무도 아닌 형국이 된다. 불리는 명칭이 있으면서도 익명적인 존재!

이것이 주체가 안고 있는 현실이다. 실은 홍길동을 '가나다씨'나, 'ABC 씨'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저 '이리 나오셔서 여권 사진 촬영하신 다음에 옆 창구에서 발행 수수료를 납부하세요.'의 당사자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2. 니가 가라 학교!

"어이, 학생!"

학교를 졸업한 지가 한참 지났음에도, 무심코 뒤를 돌아볼 사람이 있을까?

혹 만년에 배움의 열정이 가득해 새로운 배움의 장으로 나간, 나이 든 학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심결에 등을 돌려 반응할 수도 있다. 알티세르가 말하는 것처럼, 주체는 호명되기보다는, 지칭하는 것이 주체가 된다. 우리가 사는 일에도 수많은 이름이 따른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능력 있는 남편, 일 잘하는 직장인, 이웃에 친절한 아저씨 등 등...

주체라는 게 마치, '의지가 굳은 존재, 제 할 일을 책임지고 완수하는 주도자,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를 구성하는 이념적 실천자'같은 피복을 두르고 있지만, 그것은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것이다. 홍길동에 이르러면, 홍길동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처럼.

그럼에도 새삼 주체의 부활을 주창하며 머리카락이 셀 정도로 그를 애타게 불러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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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아 있네! 사라이써!

아시다시피, 주체의 폭력은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다른 종과는 구별된다는 이성의 담지자인 인간,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존재들은, 자연은 물론, 동종 간의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종족 우월주의에 따라 열등한 민족. 존재들에 대한 거세. 단종. 격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문명의 현단계에서 조차 심각한 구별 짓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런 주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위험한 존재이다. 가장 뛰어난 존재가 어떤 짓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담보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는 성립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주체는 해체하고 유동화시켜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럼에도, 이 낡아 빠진 유령을 불러내는 것은, 정체성 해체로 이 사회가 너무나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의 무한 추구를 미덕으로 삼는 오늘날, 비-주체가 타인을 새롭게 억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물질로 대신 내세워 물신화한 지는 제법 오래된다. 심지어는, 자신 속 타인마저 희생양으로 삼아, 자기 결정권이라는 미명하에 극단적 자학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체는 홍길동 주변을 둘러싼 수식어로만 겨우 세울 수 있지만, 혹 내 안의 타자를 이것으로 오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홍길동이란 호명이 실질적으로는 무명 씨 같은 존재가 아니라, 내 안의 타자인 것이다. 그러면 허망하게 연기처럼 흩어지는 호명 주체이기보다는, 내가 불러 세우는, 마주 보는 상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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