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토 출근 이틀차, 나는 다시 백수.
‘일본 워홀 바이토 면접 후기’
google, naver. daum 내가 알고 있는 대형 포털사이트에 위와 같은 검색어를 입력한다.
Working Holiday
젊은이들이 해외에서 여행하면서 일정 기간 동안 취업하여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허용하는 비자 제도.
그렇다 나는 일본에 워홀로 와있는 상태이다.
대부분의 워홀러들은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나 역시 초기 정착 비용정도만을 챙겨서 왔기에, 일을 필수적으로 해야만 했다.
나름대로 고약했던 일본의 적응기를 두 달간 가졌다.
도망치듯이 도착한 도쿄, 나는 제대로 된 준비를 해오지 않았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은 것에 여전한 두려움을 느끼지만, 이대로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만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인생 최후의 데드라인이기도 하다.
이 넓은 일본땅에 말 못 하는 외국인이 나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니 뻔뻔하지만,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구직활동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렇다, 본격적인 도쿄에서 살아남기가 시작된 것이다!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일본 워홀 바이토 예상 질문’ ‘바이토 후기’ 등을 열심히 검색해 본다.
그렇다고 아직 면접을 보러 간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겁이 많은 나의 ‘돌다리 두들겨보기’ 행동중일뿐이다.
아르바이트를 일본에서는 バイト(바이토)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 알바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
일본의 대표 구인구직 사이트인 ‘タウンワーク’와 ‘バイトル’ 앱을 먼저 다운 받았다.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나에게는 다른 것보다 그저 시작하는 용기가 더 필요한 때였다.
앱을 다운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한걸음을 내딛는 기분이다.
이후에는 당연히 현지 사이트를 통한 구직활동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아가기로 마음먹은 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 시작한 바이토는 ‘YOLO JAPAN’이라는 일본 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사이트를 이용해서 구하게 되었다.
과거 영어권 워홀을 준비했던 터라, 엉터리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어실력을 갖췄다. 이를 이용해서 영어를 사용하는 매장에서 면접을 보게 된다.
‘東京浅草かっぱ橋道具街(도쿄 아사쿠사 갓파바시)’
칼을 비롯해서 각종 주방기구와 그릇을 판매하는 거리이다. 세계 각국의 셰프들의 필수 여행지이기도 한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잠깐이지만 일을 했다. 나의 본업은 요리를 하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칼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었다.
위에서 언급한 ‘YOLO JAPAN’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지원을 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면접 날짜가 잡혔다.
면접 하루 전까지도 간단한 일본어를 필사적으로 암기해서 방문했다.
우리 동네 키요세에서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곳 아사쿠사 갓파바시에 도착했다.
두 번의 전철 환승과 한 번의 버스 탑승 끝에 어렵게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이런 출퇴근이라도 문제 될 게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매장에 도착.
‘本日、面接。。。’
오늘 면접...이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이후에는 이름을 말한 뒤 です가 아닌 と申します(겸양어)는 잊지 않고 붙여서 얘기했다.
열심히 일본어를 준비했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면접을 보는 매니저님이 백인인 캐나다사람이었던 것.
그의 일본어 또한 유창해 보이지는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면접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열심히 면접준비한 게 아깝다기보다는 보다 익숙한 영어로 면접이 진행되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컸다.
면접은 나의 긴장이 무색해질 정도로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되었고, 그렇게 다음 주 출근 날짜를 받고 면접이 종료되었다.
‘나도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순간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물론 처음 방문한 아사쿠사 구경과 근처 우에노 공원 방문도 잊지 않았다.
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가게답게 생각보다 공부해야 할 자료가 많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공부할 자료를 받게 된 나는 이틀 뒤, 출근 전까지 열심히 자료 공부를 했다.
받은 자료가 영문과 일본어로 된 자료들이라 언어 공부까지 하게 되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이때의 공부 덕분에 외운 일본어 단어가 많으니 얻은 것이 분명 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첫 출근에 나섰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일본인 직원보다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많았다.
일본인, 중국인, 프랑스, 캐나다, 미국, 터키, 이탈리아 등, 그리고 나 한국인까지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국가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에서 모두의 공용어는 영어로 통하고 있었다.
주 고객층이 외국인 손님들이기에 일부러 다양한 국가의 직원들이 고용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인 손님이 급증하면서 내가 첫 한국인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오히려 다 같은 처지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다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과 매니저님 또한 캐나다 사람이니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곳에서 ‘Jay’라는 이름의 흔한 한국식 영어이름으로 그들에게 불렸다.
외국인들이 한국이름을 발음하는 데는 무리가 있고, 무엇보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요청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도쿄에서 항상 ‘キム さん(김 씨)’으로 통했다.
첫날은 무난한 하루를 보냈다.
잔뜩 긴장했지만, 8년이라는 시간을 칼과 가깝게 지낸 사람이라 전문적인 지식이 나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손님들의 매너도 좋고, 함께 일하는 외국인 직원들도 친절했다. 관리자 급의 일본인 여성분도 귀엽고 친절해서 좋다.
점심은 매니저님이 사주신 교자를 먹으며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하루를 평화롭게 마치고 퇴근했다.
두 번째 출근날.
전날 배운 것들을 외우면서 도쿄 출근 전철에 몸을 맡겼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함께 분주한 나의 모습이라니, 뉴요커가 아니라 도쿄커가 따로 없지 않은가? 괜스레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왠지 모를 뿌듯함을 가득 안고 매장에 도착해 보니, 어제와 출근 멤버가 다르다.
어제 함께한 미국인 친구와 캐나다 매니저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처음 보는 직원들이었다.
직원만 파트타임까지 합치면 20명이 넘는다고 하니, 모두를 보려면 적어도 몇 주는 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히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좋겠다는 상당히 긍정적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날 나와 함께할 친구들은 중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캐나다 매니저님과 관리자급의 필리핀계 일본인이 한 명 있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하프 일본인 덕에 나의 첫 직장은 이틀차만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대부분의 직원들 성격이 차갑다 못해 아슬아슬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일하는 내내 필리핀계 일본인과 중국인 여자직원의 텃세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나이 20대 후반, 무법지대와도 같은 주방 안에서 어린 시절부터 잘 견뎌온 어엿한 사회인이다.
‘최대한 그들의 페이스에 말리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지만, 영어도 일본어도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나의 페이스를 점차 잃기 시작했다.
야생의 정글은 냉혹한 법이다. 포식자는 먹잇감의 약점을 물고 놓치지 않는 법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법칙과도 같다.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을 간파한 포식자들은 나를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며 나를 괴롭힌다.
‘친구들 나는 이제 겨우 출근 이틀차인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
다행인 점은 열심히 공부한 것들이 나름대로 스스로를 방어해 줬다는 것이다.
포식자의 공격은 각자의 점심시간을 갖고 난 이후에 다른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오전에 무게를 잡고 나를 물어뜯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나에게 이런저런 사적은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일본은 언제 왔어요?’ ‘왜 오게 되었어요?’ ‘무슨 일 했어요?’와 같은 시답지 않은 내용의 질문들 말이다.
나 또한 만만치 않은 사냥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그들을 상대했다.
두 번째 공격도 잘 넘겼나 싶었을 때, 그들은 결국 원초적인 공격을 나에게 퍼부었다.
갑자기 익숙한 한국어 욕이 들리기 시작한다.
‘시 x’‘개 xx’ '병 x'
내 귀를 의심했다. 적어도 이들의 입에서, 또 이 낯선 땅에서 이런 단어가 들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장 그런 단어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포식자들은 그냥 알고 있다는 대답만 할 뿐이다.
한국인이 일본의 욕이라며 ‘빠가야로’와 같은 말을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그들은 무차별한 욕과 함께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기 시작했다.
장난을 가장한 ‘이지매’가 시작된 것이다.
포식자들은 웃으며 계속 욕을 했다. 그러면서 나의 팔과 등, 어깨를 장난식으로 툭툭 치기까지 시작했다.
이 사냥감인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사냥감으로 계속 남을 것인지, 나 또한 포식자임을 알릴 것인지에 대한 끝없는 갈등이 스스로를 더 괴롭혔다.
이방인의 삶을 생각하며 이러한 텃세와 괴롭힘? 겪어 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순진하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렇기에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한 인내를 선택하고 포식자들에게 고르고 고른 말을 최대한 상냥하게 건넸다.
‘Watch your words, Please Don't touch me’
상냥했다고 생각한 포인트는 겨우 ‘Please’를 덧 붙였다는 점이다.
나의 반응에 분위기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냥감이 포식자에게 반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백인 매니저님이 상황이 이상해진 것을 감지했는지 우리 곁으로 와서 그들을 가볍게 제지했다.
그리고는 이 순간의 내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보더니 곧장 말을 건넨다.
‘Do you want to stay here?’
계속 일하고 싶냐는 의미이다.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은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그렇게 마감까지 1시간이 남은 시점.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무렵, 물러났던 포식자들은 나를 향한 이빨을 다시 드러냈다.
나의 인내심은 딱 퇴근 1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그들의 무례함을 참지 못했다.
이곳에 계속 있고 싶냐는 1시간 반전의 그의 물음에 나는 다시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은 위기 상황이 오면 초인적 힘을 발휘한다고 하던가? 안 되던 영어가 포식자들을 향해 속사포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나는 더 이상 먹잇감일 필요가 없었다.
나를 노리던 포식자들은, 아니 그 필린계 일본인과 중국인 여자는 나의 말들에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스스로 알고 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포식자가 아닌, 그저 21살 22살의 한낱 어린 친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조용조용한 일본에 사는 아이들이 아닌가.
‘너희들 한국인의 화를 감당할 수 있겠니?’라고 질문하듯이 나는 그들을 비난했다.
그 순간에 나의 사냥방식은 너희와 다른 급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아함이라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절제된 분노가 가장 무서운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인생의 선배로서.
서로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상황 역시 매니저님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Thei rudeness has made me leave this here. Bye’
과거 영어 공부를 위해 7개월 정도를 외국인 손님으로 가득한 마포 게스트하우스에 일했었다.
그때 다양한 영어를 배웠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당신은 무례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잘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게 일본에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나는 위와 같은 말을 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짐을 챙겨 나왔다.
곧장 들었던 감정은 후회였다. 이런 일이 휘몰아치고 나면, 자기반성을 먼저 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더 현명한 선택과 말은 무엇이었을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후회도 잠시, 거대한 도파민의 쓰나미가 나를 완벽히 덮쳤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짜릿함을 맛본 게 언제인가 기억을 되짚어 봤다.
이 떨림은 결코 추워서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희열감이라고 확신했다.
‘말도 제대로 못한 이 몸이 스스로를 잘 지켜냈구나’라는 승리의 도취감에 빠진 것이다.
물론 다음날이 되어서는 이런 유치한 마음에 사로잡힌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날의 나는 오전의 뿌듯함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틀차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다.
참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이상하리 마치 얻은 것들이 많은 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