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 그리고 첫 번째 퇴사
고작 9개월 만인데도 회사의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신입사원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코로나로 인해 강의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사무실 곳곳에 있던 개인 강의 연습실이 Zoom 강의실로 변해 있었다. 라떼만 해도 대면 교육을 나가 부모님, 선생님들과 호흡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는데 말이다. 육아휴직 중에도 동료들에게 변화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9개월 사이에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 물론 코로나의 영향이 컸겠지만.
아이는 출산휴가에 들어간 지 2주 만에 태어났다. 역아였기에 38주 3일에 여유롭게 제왕절개로 출산하려고 했지만, 37주 6일 차에 갑자기 진통이 와 응급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그 억울하다는 진통과 수술을 동시에 겪은 케이스가 내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제왕절개 수술 부위를 아주 예쁘게 꿰매어주신다고 소문난 임신 전 기간을 나와 함께 해준 담당 선생님이 아닌 난생처음 보는 응급 당직선생님에게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밤새 등이 아팠지만 초산인지라 그게 진통인 줄도 모르고 아침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아 말 그대로 응급 수술을 해야 했기에 남편이 보호자 사인을 하고 있는 사이 수술실로 옮겨져 뒤늦게 발견한 남편이 울면서 달려오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이때 남편의 눈물을 처음 본 것 같다. 남편은 수술실 앞이 처음이라 그런지 순간 다시 못 볼 것만 같고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그 와중에 이 사진을 찍은 남편도 참 대단하다.
임신한 상태에서 출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복불복이라는 입덧은 임신 8주 차부터 시작되었고, 입덧약을 먹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이때 회사에서 중요한 브리핑의 한 파트를 맡게 되었고, 임신 초기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나는 2주간의 연수를 강행했다. 그 대가는 일주일 동안 침대에서 꼼짝없이 눕는 것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단연 출퇴근이었다. 지옥철이라 불리는 9호선 급행을 타고 강남까지 가야 했고, 임산부 배지를 달고 있어도 자리를 양보받기는커녕 배가 눌리지 않도록 양팔에 힘을 주어 벌려 아이를 보호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버티던 멀미 같은 입덧도 5개월 차가 되니 사라졌고, 이제 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철보다는 차라리 운전해서 출퇴근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나름 출퇴근길드라이브를 즐기던 찰나, 임신 6개월 차에 난생처음 0:100의 3중 추돌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주유를 하고 나오던 택시는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했지만, 뉴스에서나 보던 이야기처럼 가속 페달을 잘못 밟았고, 뒷좌석이 들이 받힌 내 차는 180도 회전한 후 주차되어 있던 트럭을 한 번 더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천만다행으로 아이는 무사했지만, 나는 사고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고가 난 후였고, 내 차로 달려드는 사람들과 뒤엉킨 차량들 속에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이 보였다. 남편에게 울면서 겨우 전화를 걸었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부축해 119에 태웠고, 난생처음 가보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처음 만난 산부인과 의사는 아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이후 목과 허리에 극심한 통증이 시작됐지만, 임신 6개월 차의 임산부는 찜질 외에는 어떠한 치료도, 어떠한 진통제도 허용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 임산부를 위한 단축 근무 제도는 임신 전 기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난 둘째 계획은 없지만, 미래의 후배 맘들을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냥 출산휴가를 조금 일찍 들어갔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 죽일 놈의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든 맡은 프로젝트를 조금이라도 더 마무리하기 위해 신경을 쏟았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는 건강했고, 강했다. 결국 퇴원하자마자 밀린 외주 미팅을 이어갔다. 그래, 내가 그렇게도 애썼더랬다. 그렇게까지 애썼던 일을 결국 이렇게 내려놓게 될 줄이야. 출산휴가 2개월, 육아휴직 7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가의 머리맡에 코를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너의 향기.
복직이 아닌 퇴사를 선택한 후,
문득문득 불안이 마음 한구석을 두드린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나의 시간은? 나의 미래는?'
행복과 두려움이 얽혀드는 순간,
나는 너를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다시,
너의 머리맡에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향기를 들이마신다.
그 향기로, 마음을 다독인다.
2020년 12월, 사직서를 낸 후 끄적인 나의 일기 中.
퇴사를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하나가 해결되면 지금까지의 내 삶 속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내 예상보다 훨씬 나는 육아와 살림에 재능이 없었다. 가장 큰 난관은 '요리'였다. 물만 마셔도 살찌는 체질이라 다이어트 강박이 있었던 나는 요리를 시간 낭비라고 여겼었다. 강의를 위해 정장 55 사이즈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잘 차려진 아침상보다는 잠을 선택했다. 당연히 아침은 커피와 사과 몇 조각으로 해결했고, 점심은 회사에서, 저녁은 약속이 있거나 남편과 시간이 맞아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삶은 두부나 샐러드를 먹었다. 그런 나에게 아이의 이유식, 밥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블로그, 인스타, 유튜브 속 육아 선배님들은 몇 분이면 뚝딱하는 이유식이 나는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밖에서 사다 먹이는 횟수도 많아진다고 하니, 내가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는 이 순간만큼은 정말 최선을 다해 직접 해주고 싶다는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절... 심지어 당시에는 유기농 강박에 사로잡히기까지 해, 집 앞 마트 대신 왕복 40-50분 거리에 있는 유기농 마트를 고집하며 빠뜨린 재료가 있으면 유모차를 끌고, 아기띠를 매고 장을 봐오곤 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동안은 운전대를 잡지 못했기에, 남편이 출근한 후 나의 생활 반경은 도보권이었다.
요리만큼이나 육아에서 힘들었던 점은 ‘나만의 시간’이 극도로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마치 엄마 냄새 탐지기를 지닌 듯했다. 육아에 적극적인 딸바보 남편은 퇴근 후나 주말에는 나에게 자유 시간을 주려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평소 밤 8시부터 아침까지 통잠을 자던 아이도 잠들기 직전 엄마가 없으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울어댔다. 출산 전 계획했던 분리 수면은커녕, 홀로 친정에서 하룻밤 자고 오거나, 지인들과 저녁 약속을 잡거나, 운동을 하는 등 남편 퇴근 후 가능한 일들은 대부분 포기해야 했다.
한 번은 아이를 재운 후 밤 9시 필라테스를 등록했지만, 중간에 깨어 엄마를 찾으며 울어대는 바람에 그날로 나의 운동은 종료됐다. 누군가는 울려서라도 적응을 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어린아이가 목이 쉬도록 엄마를 찾아 우는 모습을 보며 ‘그깟 운동이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무렵, 친구들과 대학가에서 재미 삼아 본 사주풀이에서 아주머니가 내게 역마살이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나에게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때로는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빛을 잃어가던 내게 남편은 낮에 아이가 낮잠을 잘 때만이라도 유모차에 태우고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책이라도 읽어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마저도 긴장을 놓치는 순간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결국 허둥지둥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나오는 날들이 반복됐다. 마치 ‘82년생 김지영’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도 챙기지 못한 채 우는 아이를 달래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직장 동료들과 여유롭게 대화하며 나오던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진 출처 : Unsplash의Suhyeon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