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마다 조상 덕 본집은 해외여행 가고, 그렇지 않은 집은 차례상을 차린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많았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말은 안 했지만 씁쓸했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명절 때마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30인분" 가량의 기름때 가득한 그릇들을 싱크대의 뜨거운 물로 설거지를 하고 닦아내다보면 나는 마치 한증막의 사우나를 한 듯 온몸에 땀이 나고, 그릇의 기름때가 순간 내 머리로 이동한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머리카락은 떡지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설거지처럼, 밤새 얘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뒤에 말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결혼을 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명절연휴에 시댁에 가지 않았다. 며느리에게 주어지는 이 모든 은혜로운 축복은 코로나 덕분(?)이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이번 명절연휴는 굉장히 소중해서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걷기'.
늘 그렇듯, 나에겐 또 걷기다.
가을로 넘어가기 전 푸릇푸릇한 여름의 산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었고 부담 없이 오르기 좋은, 늘 내 마음속에 아쉬운 마음으로 남아있었던 '간월산'은 어떨까 생각했다.
사실 갔던 길, 알고 있는 길을 한번 더 가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 길이 어려운 길이라는 걸, 쉽지 않다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아이들을 설득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아이들을 강제로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아이들의 위시리스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의 엄마이자, 최고의 '협상가'다. 아이들이 읽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만화책'으로 아이들과 가뿐히 협상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간월산에 오를 짐을 챙겨 간월산 주차장으로 향했다.
첫째 아이가 썼던 일기 중, 한 부분.
우리가 도착한 배내 2 공영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명절연휴인데도 우리처럼 산에 오르려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차장 주변 갓길에 차들이 일렬로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고 우리는 주차장과 한참 떨어진 곳에 겨우 주차를 했다.
서둘러 산에 오를 채비를 하여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오늘도 날씨가 심상치 않다.
왜 내가 산에만 가는 날이면 반갑지 않은 구름이 자꾸 나타나는가!!
'구름아 제발 비켜줘~'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내 마음이 구름에게 떼를 쓰며, 그렇게 6개월 만에 다시 간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간월재를 넘어, '간월산'까지 오를 예정이다. 배내 2 공영주차장에서 간월재까지는 완만한 경사가 있는 구간이지만, 초보자들도 가볍게 오를 수 있을 만큼 평평하게 길이 나있다.
오늘 간월산 정상으로 오를 코스는 '배내 2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간월산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로 편도 6.9km의 평균 2시간 31분 정도 소요된다.(왕복 13.8km / 예상왕복시간 4시간 30분~5시간)
간월재까지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아이의 발걸음에 우리의 걸음을 맞추어 함께 길을 걸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 아닌 간월재까지 넓고 고른 임도길이라 아이와 손을 잡고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산을 오르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간월재에 도착을 했다.
간월재에서는 여름이 가을의 다가옴을 밀어내는 듯, 가을이 가기 싫어 붙잡고 있는 여름의 끝자락을 밀어내듯, 억새가 바람을 따라 여름으로 가을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고, 억새평원이 주는 넓게 트인 간월재의 공기가 올라오며 흘렸던 땀을 식혀주듯 더 시원하게, 땀이 식으며 때론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름과 가을사이 계절을 온몸으로 느꼈던 간월재였다.
간월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는 길의 시작은 계단이었다. 생각보다 가파른 계단길이었지만 고도를 높이며 올라갈수록 간월재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산 위 억새평원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계단길이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이 이어지며 '밧줄길'이 나타났다. 한라산 백록담으로 오르는 밧줄길의 경사만큼은 아니었지만 큰 돌들로 꽤 험했던 밧줄길이었다. 아이들은 능숙하게 밧줄을 잡고 돌을 밟아가며, 밧줄길의 고수가 된 듯 산을 올라갔고 그런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는 뒷모습도 사랑스럽지만, 나는 '산'을 올라가는 씩씩한 아이들의 뒷모습이 왜 그리 더 더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나 또한 산에게 안기듯, 밧줄과 바위와 밀착되어 밧줄길을 올랐다. 그렇게 간월재에서 아이들과 30분 정도 더 올라 간월산 정상에 도착했다. 간월산 정상은 완벽한 구름 속이었고, 아래의 간월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간월산 비석만 보이는 정도였다. 간월산으로 오르기 시작할 때 느꼈던 불길했던 나의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또 '구름' 이었다. 산에만 오면 만나는 반갑지 않은 나의 등산메이트, '흐린 구름'.
그런데 오늘은 반갑지 않은 친구가 더 찾아왔다. 바로 '날벌레 떼'. 정상에 올라오며 구름 속에 함께 돌아다녔던 녀석들이다. 비가 오려고 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날벌레들이었다. 이 날벌레들은 옷에도 달라붙고, 땀으로 범벅된 내 얼굴에도 달라붙었다. 구름 속이라 시야도 답답한데, 날벌레를 후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정상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간월재의 모습과 영남알프스의 여러 산맥들을 보고 싶어서 기다렸지만, 흐린 구름과 날벌레 떼들은 좀처럼 간월산정상에서 비켜줄 생각이 없었고, 결국 우린 간월산 정상에서 아래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구름 속 인 간월산 정상에서, 간월재로 내려가는 길
명절 전날이라 그런지, 간월재휴게소는 문이 닫혀있었다. 기대했던 인생최고의 '라면'을 맛보진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마음으로 3월에 만나지 못했던 간월산을 다시 올라보며, 결코 쉽지 않았던 '간월산의 정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 가던 도중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땐 한숨 고르며 쉬어가도 좋다. 언제가 되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분명 이겨 낼 수 있고, 더 강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봄의 간월산에서 '오뚜기 진라면의 진가'를 느꼈다면,
가을의 간월산에서는 '오뚝이의 7전 8기의 진가'를 느껴보았던 우리.
※ 7전 8기(七顚八起):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뜻으로, 많은 실패에도 굽히지 않고 분투함을 일컫는 한자성어다.
2021.9.20 추석 전 날, 간월산 정상에서
오늘은 특히 '흐린 구름과 날벌레 떼'로 산에 오르는 것이 더 많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늘 함께 동행해 주는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아홉 번째 걷기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간월산 정상, 간월재 휴게소 tip]
간월산 정상으로 가는 길
9월 20일 비가 오려고 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간월산 정상에서는 간월재에서 보이지 않았던 날벌레 떼가 굉장히 많았다. 산에 올라갈 땐, '해충기피제'를 꼭 뿌리고 올라가야 한다.
간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계단길도 있지만 울퉁불퉁 돌길도 있고, 밧줄을 잡고 오르는 길도 있어서 아이들과 올라갈 땐 미끄럼방지 '장갑'은 필수다.
간월재 휴게소 정보
매일 10시부터 16시 30분까지 운영을 하고 있다. (적설기 11시부터 16시)
명절당일에는 휴무, 하지만 명절 연휴에도 간혹 휴게소 운영자의 사정에 따라 휴무로 변경될 수 있다.
간월재 휴게소 판매물품은 생수, 컵라면(3월. 9월 모두 짜파게티는 없었다), 구운 계란, 햇반, 과자, 아이스크림 등을 판매하고 있다. (카드결제만 가능)
※ 배내 2 공영주차장 주변에 가끔 사나운 '들개' 들의 출현이 잦다고 하니 주의해서 산에 오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