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취향에 흠뻑 취하고 싶은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과 영화 묶어보기

by 유쾌한 주용씨

소설과 영화를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원작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각색한 영화를 묶어서 봅니다. 명작을 두 배로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상상했던 부분과 영화 속 장면을 비교합니다. 대부분은 영화보다 원작 소설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영화는 달라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이 좋은데 짧아서 아쉽거든요. 그 아쉬움을 웰메이드 영화가 채워 줍니다. 대형 영화관에서 시끌벅적하게 홍보했지만 실망만 안겨준 영화에 싫증 났다면 이 두 편의 영화에 만족하실 거예요. 왜 그런 날 있잖아요? 뻔한 일일 드라마 말고 메타포를 지닌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하고 싶을 때요.


-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개성이 넘칩니다. 매력적이에요. 하루키는 좀 복잡한 인물들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해냅니다. 그래서 단순하지 않은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눈앞에 선명하게 서 있는 기분이에요.


소설가이면서 30대 유부남인 나.

나와 가끔 만나는 나보다 11살 어린 그녀.

그녀가 아프리카에 다녀오면서 함께 온 그.


소설에서 ‘그’는 가끔 헛간을 태운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의 이상한 취미에 관심을 갖게 돼요. 자신의 집 가까운 헛간을 태울 계획이라는 ‘그’의 말에 집 주변의 헛간을 조사하고 관찰하지만 결국 헛간이 타는 걸 발견하진 못해요. 시간이 지난 뒤 ‘그’를 우연히 만나는데 이미 헛간을 태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즈음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녀’를 찾아보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어요.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고요.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납니다. 좀 허무하죠? 짧은 소설을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습다. ‘그’가 정말 ‘그녀’를 죽인 걸까? 왜? ‘그’는 정말 ‘그녀’를 헛간처럼 태워도 되는 존재라고 여긴 걸까? 의문이 많이 남는 소설이었어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고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안개.jpg 영화 <버닝>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 <버닝>에서는 많은 부분이 각색, 추가되지 않았을까 예상했습니다. 우선 인물부터가 달라요.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

정체불명의 남자 벤,

종수의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


영화는 이 세 사람의 만남과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비밀스럽고 강렬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소개합니다. 소설은 단편이기 때문인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 서로에 대한 마음이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아요. 그게 소설가의 의도인지도 모르죠. 그에 비해 영화는 세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심리가 좀 선명하게 그려질 것 같았어요.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 제목 버닝(Burning)이 "일상에서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라며 "뭔가 불태우고 싶고 열중하고 싶지만 반대로 열정을 불태우기 힘든 이중적 의미도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번 영화는 젊은이의 영화, 그래서 젊은이들 감각으로 접근하려 했답니다.


영화에서 이 세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는 아니겠지만 어떤 희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망가뜨릴까 봐 걱정도 됐어요. 서로를 해치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려질 것 같기도 했고요. 아픔과 상처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결국엔 희망을 찾아 나오는 결말이길 바랐습니다. 우리 두 아들을 생각하면서 말이죠.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죽거나 절망으로 끝나버리면 너무 안됐잖아요. 영화가 끝나고 "도대체 뭔 얘기야?"라며 실망하는 듯한 관객의 목소리도 있었어요. 소설도 영화도 쉽게 이해되는 내용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야기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사실적인 분위기, 영화 음악까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영화다웠어요.


주인공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당장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지친 듯 살아가고 있는 종수 앞에 갑자기 해미가 나타났어요. 눈에 초점을 잃은 듯했던 종수는 통통 튀는 해미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종수에겐 분노 장애로 폭행 재판 중인 아버지가 있고 자식을 버리고 나갔다가 16년 만에 빚이 있다며 찾아온 엄마가 있어요. 그런 종수에게 해미는 삶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존재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해미도 그렇게 밝은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꿈도 가슴에 품지 못하고 삶을 불안하게 이어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녀는 아르바이트하며 번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합니다. 해미의 말에 따르면 부시맨이 사는 그곳엔 두 부류의 헝거가 있대요. 그냥 배가 고픈 Little Hunger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Great Hunger요.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러 케냐로 가겠다고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노을 속에서 상의를 벗어 던진 채 해미가 춤을 추는 장면이었어요. 기이하면서도 무척이나 슬퍼 보였거든요. 해미가 손으로 만들어내는 날아가는 새의 형상은 그녀의 자유로운 꿈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잡히지 않고 날아가버린 새처럼 허무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벤은 부유층이 사는 반포 아파트에 살고 비싼 차 포르쉐를 몰고 다녀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그에겐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상한 취미가 있답니다. 벤은 더이상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비닐하우스가 태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대요. 하루키의 소설 속 헛간과 영화의 비닐하우스는 세상에 버려진 듯한, 해미와 같은 존재를 비유하는 것 같아요.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는 존재, 인생에서 쓸모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 말이죠. 벤은 해미를 묘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벤에게 해미는 잠시 흥미를 느낄 만한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벤에게는 그녀를 없애는 것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을까요?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그녀’가 사라진 채로 끝이 나지만 영화는 벤의 사이코패스적 행위를 응징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거나 결론지을 수는 없죠. 흔들리던 해미의 삶이라 하더라도 벤이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되는 거였습니다. 가난하고 상처투성이였던 종수는 이 세상에 버려진 듯 보이는 해미를 사랑했어요. 그녀를 지켜내진 못했지만, 그녀의 삶을 마음대로 태워버린 벤을 그냥 둘 순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단어는 결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수와 해미는 돈이 없어요. 가족의 관심과 애정도 없고요. 곁에서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 그런 관계가 없었어요. 벤에겐 슬픔이라는 감정이 없어요. 슬픔을 모른 채 타인에 대한 진심이 있을 수 없죠. 돈만으로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해미를 사랑하지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 종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해미, 정신적 결핍을 비닐하우스(여자)를 태우는 것으로 충족하는 불쌍한 부자 벤. 그들은 모두 외롭고 불쌍해 보여요.


해미와 벤은 1차원적 배고픔만을 충족하려 한 ‘리틀 헝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둘은 죽음으로 끝이 나죠. 그에 비해 끝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 한 종수가 ‘그레이트 헝거’이지 않을까요?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은 채 태워버린 벤을 종수는 자신이 입었던 옷과 함께 태워버립니다. 불타는 것을 뒤로 하고 알몸인 채로 그곳을 떠나는 종수. 영화의 그 마지막 장면이 종수에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불안합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이 삶이 어렵고 두렵습니다. 20대엔 40대가 되면 편안한 어른이 될 거라 기대할지 모르지만 고단한 40대는 꿈을 품은 20대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죠. 어른이 되어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젊다고 다 꿈을 펼치며 살 수는 없을 거예요.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순 없잖아요? 내 인생이데요. 어떤 상황에서든 내 삶을 만들어가는 건 다름 아닌 '나'입니다. 그건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다 마찬가지죠. 안개가 낀 듯 앞이 잘 안 보일 때도 있지만 잠시 기다리면 안개가 걷히고 길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지금 당장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를 포기해선 안 되죠.


해미는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어른으로 자라지 못했고 벤은 정신적 결핍을 건강한 방법으로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종수처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부딪치고 달려봐야죠. 젊은이의 영화를 보며 앞으로 숱한 어려움에 좌절하며 성장할 우리 두 아들을 떠올렸습니다. 후회 없이 잘 살아오진 못했지만 젊은 날을 경험해본 어른으로서 아들들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엄마가 되어 줄 것을 결심했습니다. 좋은 영화는 책과 함께 저를 성장시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드리이브 마이 카>


4.jpg 영화 <드리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 연출을 공부하는 큰아들이 개봉 6개월 전쯤부터 무척이나 기다렸던 영화입니다. 궁금한 마음에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읽었는데 리뷰도 쓰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책에 대한 느낌이 흐릿해졌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부랴부랴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 읽었습니다. 기대하는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 큰아들에게 원작 소설에 대해 간단하게 브리핑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드라이브 마이 카」는 미사키가 운전하는 사브처럼 조용하게 마음에 스며드는 소설입니다. 사연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도 살짝 꺼내 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샘이 나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장편, 단편으로 계속 써낼 수 있는지 신기합니다. 참 탐나는 재능이에요. 하루키와 같은 대단한 이야기꾼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50페이지 정도 되는 하루키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가 3시간의 영상으로 어떻게 그려질지 생각하니 무척이나 설렜어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기 전에도 그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읽고 영화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었거든요.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이번에도 무라카미의 소설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문장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그건 병 같은 거예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한다.“

"그럴 거예요. 많든 적든.“

《여자 없는 남자들》 p.37, p.59


소설을 읽다 보면 '그래, 내 마음이 이런 거였어' 하며 무릎을 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언어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는 순간이에요.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남녀 사이는 한 마디로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없죠, 아주 미묘하고 종합적인 문제인 게 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특히 이성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대할 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닥칠 때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꿀꺽 삼키고 별거 아니라는 듯 연기하며 살아가라는 조언이 참 그럴듯해요. 소설 속에는 우리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가후쿠는 그 침묵에 감사했다.

《여자 없는 남자들》 p.60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좁은 차 안에서 서로의 과거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다 미사키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운전하고 가후쿠는 그 침묵에 감사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침묵이에요. 어떤 말보다 침묵이 주는 위안을 느낍니다. 낯선 사람과는 편안한 침묵을 공유하기 힘들어요. 말이 없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들은 아주 오래되었거나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일 거예요. 남편과 차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갈 때 가끔 아주 긴 시간 아무 말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 기분이 꽤 괜찮아요. 분위기를 띄우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피곤하지 않아요. 함께 있으니 외롭지 않고, 각자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어 평온해집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었는데도 책장을 덮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이 꽤 오래 가더군요.


소설에서는 12년 동안 탄 가후쿠의 차가 노란색 사브였는데 영화에서는 빨간색으로 바뀌었어요. 주인공 가후쿠는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생겼고요. 여주인공은 생각보다 예쁘지 않지만, 무표정이 매력적이었어요.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참 독특한 조합이에요. 러닝타임 179분의 긴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가 됐어요. 새로운 건 소설이든 영화든 모두 흥미롭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힘들지 않은 상처는 없지만 견뎌내거나 극복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죠. 어떤 사람은 회피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헤집어내어 더 심하게 상처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방치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만들어낸 아픔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서서히 아픔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그 상처를 소재 삼아 글을 쓸 정도로 여유도 생겼고요. 미사키와 같은 친구는 없지만,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에서는 없었던 인물, 우리나라 배우 박유림의 등장은 아주 적절했습니다. 수화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어떤 말보다 묵직하고 아름다웠어요. 소설에서 느꼈던 침묵의 힘을 또 한 명의 인물이 가세해 더 진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감독의 배우 캐스팅과 연출 감각에 박수를 쳤습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아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아주 선명하게 들리고, 울지 않는데도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울컥했어요. 남아 있는 내 상처를 치유 받는 기분이 들더군요. 내 주변에 다른 이들의 아픔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마음 통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는 게 조금 쉬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영화로 인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습니다. 큰아들은 2021년에 본 영화 중에 단연 1위라고 하더군요. 영화관 주차장에서 공부 잘하는, 언니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큰아들과 샘이 많은 나는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주차장을 나오면서 주차비 정산을 해주시는 할아버지께 따뜻한 차 한 잔 사드시라고 지폐 한 장을 드렸습니다. 크리스마스 인사도 전했죠. 너무 좋은 영화를 봐서 따뜻해진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환하게 웃으시는 할아버지 인사는 덤이었어요. 아들이 그런 나를 보며 미소를 짓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큰아들과 영화에 대한 감상을 침묵이 아닌 수다로 풀었습니다. 아들은 친구와 함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 번 더 보고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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