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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18. 2023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소설을 읽는 맛! 꿈처럼 설레고 달콤하다.

너무 오래 걸렸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책을 겨울로 온전히 들어선 지금, 드디어 마지막 장을 덮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올해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장편 소설이다. 분량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처음엔 밤에 잠자리에서만 아껴서 읽기 시작했고, 나중엔 다른 읽을 거리가 많아져서 좀 밀린 탓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하루키의 소설은 그 내용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특이하고, 인물도 독특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읽어가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탄력적인 글을 써내는 하루키의 솜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설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장을 펼치면 바로 빠져든다. 소설 속 세상으로 들어가 주인공과 한 공간에 어색함 없이 함께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 하고 단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 작가 후기 중에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하루키가 서른한 살에 문예지에 발표한 중편 소설을 40년이 지나 일흔한 살이  되어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 완성한 작품이란다. 박완서 작가처럼 요즘엔 오랜 시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온 작가들의 글이 소중하게 읽힌다. 내가 그만큼 어떤 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해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그토록 원하는 읽고 쓰는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니 부러움과 존경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깜깜한 인생에 희미한 빛처럼 길이 되고 희망이 되어 주니까. 박완서의 글을 읽을 때면 삶의 모든 것을 글로 풀어내는 사람으로 살면 적어도 무료하거나 심심하지는 않겠다 싶더니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나니까 나도 이렇게 나만 쓸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한 편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나에게 에세이나 산문은 현실이고 소설은 꿈이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p.68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하루키가 진지하게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 이야기 속에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처음엔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꿈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무엇이 현실이고 꿈인지 단정짓기가 힘들었다. 나라는 육체가 실체고 그림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세상에 이유 없는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지금 이 세계에 사는 나 말고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가 있을 것만 같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이 우주에 나란 사람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인식하면서 겸손함을 배웠다면, 이 소설을 읽으며서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 너머 그 불확실한 벽을 넘어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여기서와는 다른 역할을 하며 다른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나,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껏 상상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p.15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기다리고 싶다는 마음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p.680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p.754


주인공은 벽 안의 도시,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의 오래된 꿈을 읽는 일을 한다. '꿈 읽는 이' 꿈에 이어지는 동사는 꾸다, 이루다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읽다'라는 동사와 어울리니 무척이나 그럴 듯하다. 그것도 나를 위한 꿈이 아니라 다른 이의 오래된 꿈을 읽는다니... 그런 기분은 어떤 것일까? 이런 발상을 한 하루키의 상상력에 또 한 번 감탄! 처음 열일곱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준 열여섯 살의 '너' 그리고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에서 약초 차를 끓여주던 '그녀'. 40대 중년의 주인공이 관장으로 일하게 된 마을 도서관에서 만난 고야스 씨(유령이라고 해야 하나?), 유일한 직원 소에다 씨, 그와 함께 책과 음악을 이야기하며 진정한 소통이 가능했던 커피숍의 '그녀', 그리고 천재 끼 충만하고 신비롭기 짝이 없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까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만난 인물들은 쉽게 잊힐 것 같지 않다. 


예전에는 - 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 - 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
p.635~636
 
내가 가진 의식과 기억은 틀림없이 현재의 나의 것이었다. 나는 사십대 중반에 축적된 마음과 기억을 유지한 채, 몸만 십대 청년으로, 혹은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p.691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시간이 너무 많아서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일 년이 아쉬워지더니 한 달이 너무 금세 가고, 일주일이 하룻밤 같더니 이제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한 나절처럼 짧게 느껴진다. 오십 대가 된 지금의 마음과 기억을 유지한 채 시간을 좀 길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가는 시간이 너무 아쉬워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지금의 마음으로 열일곱 살이 된 나를...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생각을 고쳐 먹는다. 더 나이를 먹은 다음에 후회하지 않도록 이 순간을 뜨겁게 살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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