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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25. 2023

최은미 소설 《눈으로 만든 사람》

나도 언젠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은유 작가의 메타포라에서 3개월 동안 여러 학인들과 함께 읽고 글쓰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메타포라 학인이 되어 좋은 점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평소 내가 고르지 않던 책을 읽게 되고 몰랐던 작가를 알게 된다는 점이 큰 즐거움이자 소중한 경험이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고전이나 세계 문학을 주로 읽었던 내게 최은미 소설 《눈으로 만든 사람》은 신선하고 낯설었다. 2월에 작은아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인문학 서점 유화당의 주인장이 추천해줘서 알게 된 김숨이나 권여선 작가의 소설도 아직 익숙해지기 전이다. 요즘 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접하면서 부쩍 여성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굵직한 스토리 중심의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섬세하고 미묘한 표현에 탄성이 배어나기도 한다.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던 막연한 꿈에 더욱 소원해지는 듯하다가 '아니지, 이렇게 읽다가 문득 나만의 이야기나 나다운 스타일을 발굴하게 될지도...' 라는 순박한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보내는 이」


나는 지금껏 여자들과 끈적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끔 외로웠고 덜 예민했다. 어떤 일에 대해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함께 공감하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 없으니 대부분의 일들이 현재에만 잠깐 존재하다 흘러갔다. 남편에 대해 토로할 상대가 없어서인지 나는 남편과 싸웠던 기억은 쉽게 잊고 평온해진 오늘을 즐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나에게 특별하고 이상한 또는 부끄럽지만 지나고나니 그립기도 한 그런 인간관계가 있었는지. 그들과의 시간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진아씨네 식탁 등이 아무리 각별해도 여긴 내 아이의 친구 집이다. 진아씨는 내 아이 친구의 엄마이며,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비슷한 여건과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관계를 이어가는 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제 아는 나이이므로, 이 관계를 오래 가꿔가고 싶다면 훅 들어가선 안 된다. 우리를 짓누르는 사회구조적인 것들에 대해선 얼마든지 얘기를 나눠도 좋지만 개인적인 고통을 털어놓는 건 신중해댜 한다. 아이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내 아이에게 불리한 빌미가 될 수도 있으므로, 내 스트레스 상황 또한 너무 드러내는 건 좋지 않다. (p.17~18)



「여기 우리 마주」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엄마와 아내의 노동은 가중되었다'라는 글을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마스크 대란을 겪었을 때였다. 조금이라도 싸게, 많이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섰던 적도 있다. 외식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하루 세 끼, 두 아들과 남편의 밥을 해대느라 분주했다. 그때 나도 스트레스 좀 받았었다.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던 때라 집안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코로나와 같은 큰일이 닥쳐도 남자는 변함없이 자기 일만 하면 되고 여자는 더 신경쓸 일이 많아진다는 게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코로나와 싸우느라 남편과 싸울 시간도 힘도 없었다. 


은채의 표정이 좋지 않으면 남편은 딱 한마디를 하고 지나갔다. 우리 딸 사춘기인가! 남편은 은채가 열 살일 때도 그 말을 했다. 우리 딸 사춘기인가! 하하하! 기분이 좀 좋은 날이면 남편은 서점에 들러 초등 고학년 딸이 엄마와 갈등을 겪다 서로를 이해하는 내용의 아동소설을 사왔다. 그는 한 번도 부녀 관계에 대한 책은 사오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이 주방까지 오지 않아 딸을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그는 바람을 주방까지 보내주려고 선풍기를 끌어와 이리저리 돌리며 애를 썼다. 하지만 자신이 주방으로 와서 저녁을 만들진 않았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교과서를 모두 집으로 보낸 뒤 정기적으로 아동학대 예방 안내문을 보내왔다. 그 안내문은 학부들의 휴대폰에는 가닿지 않았다. 학교는 계속 물었고, 주 2회 등교를 할지 주 3회 등교를 할지 택하라 했고, 내게 방역의 주체가 되라고 했다. 매일매일 감염을 걱정했지만 그 봄에, 남편은 은채와 내가 밀접하게 체감해야 했던 또다른 시국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방어하는 말 외에는. (p.62~63)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말한다. 자기야, 자긴 왜 그런 거야? 다른 여자들처럼 그냥 좀 편하게 살면 안 돼? 정말 숨이 막혀! 나는 얼굴이 빨개진 남편을 보며 생각한다. 숨이 막히면 좀 죽어도 되지 않나? (p.71)


「눈으로 만든 사람」


가족,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들. 가깝기 때문에,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면 그건 과거의 1차 폭력에 이은 2차 가해일 수 있다. 힘없고 나약했던 어린 시절, 힘있고 강했던 어른이 가한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지나왔으면서도 기억에 오래 남는 폭력이 없다. 상처가 없다는 건 다행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잊으려한 건 아닌지 가끔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나와 내담자」


타인의 고통을 내것처럼 느끼고 내것이 아닌 아픔을 공감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으며 공감력이 늘어나고 감수성이 깊어지는 건 느끼지만 직접 경험이 아니므로 한계가 있지 싶다.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반응하는 내가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느껴질지 의심스럽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와 깨달음으로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고 사는 것. 강수영이 그걸 얼마나 원하는지 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강수영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한 번도 만지지 못하던 것들을 자신의 상자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p.150)


「운내」


이 소설을 읽으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어느 곳에서의 기억이 나에게도 있나 떠올려봤다. 15살까지 살았던 충청남도의 우리 집. 파란 지붕이 선명했던 금강 근처의 그 집이 나는 아직도 우리 집 같다.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고 기억해봐야 지금 사는 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잊힌 내 과거의 사연들이 애틋하고 그립다. 구질구질하게 과거를 붙들고 글을 써보고 싶은데 이제 와서 그게 되려나?


수련자는 살아온 과거를 시간순으로 떠올리며 과거를 시각화해야 한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어떤 장면들, 섬광 같은 기억들은 물론 잡히지는 않으나 없는 것은 아닌 기억들까지 모두, 모두 시각화해 차례차례 지구에 버려야 한다. (p.162)


「美山」


소설가는 도대체 몇 개의 몸, 몇 개의 마음, 몇 개의 삶을 사는 것일까? 20대 때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서 잠시 연극 배우를 꿈꿨던 것처럼 지금은 소설가를 꿈꾼다. 최은미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나다운 이야기도 다양성에 한 몫 할 수 있지 않을까 호기를 부려보고 싶기도 하다.


여전히 떠오른다. 왼쪽 손에 들려 있던 잠자리의 왼쪽 몸통과 오른쪽 손에 들려 있던 잠자리의 오른쪽 몸통이. 잠자리가 찢어질 땐 잠자리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는 걸 알게 되던 순간이. 내가 정말 가져보고 싶었고 만져보고 싶었던 것, 그것이 내 손에 닿자마자 훼손되던 순간의 충격과 슬픔을, 나는 여전히 떠올린다. (p.216)


「내게 내가 나일 그때」


글쓰기는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글쓰기를 통해 나는 어떤 삶을 꿈꾸는가?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다. 방향을 정확히 잡지 못했으니 내 글이 나답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렸구나 싶다. 내게 내 글이 온전히 나다울 그때를 그린다. 문득 '올해는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어야지' 결심한다. 읽다보면 뭐라도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마구마구 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주길 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p.247)


「11월행」


내가 듣지 못한 소리들을 생각했다. 암과 싸우느라 멀쩡한 정신으로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한 아빠의 유언, 요양병원에서 말을 잊고 기억을 잃더니 눈 감은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여준 엄마의 못다한 말, 아침에 멀쩡하게 나가셨다 밤에 교통 사고로 죽은 몸이 되어 돌아오신 시어머니의 당부,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돌아가셔서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한 시아버지의 서운한 목소리. 남편과 내 부모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살아계실 때 제대로 좀 듣고 더 친절했어야 했는데… 


그날 규옥은 자면서 간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주 긴 시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오랫동안 집안의 노동과 집밖의 노동을 함께 해온 사람의 소리. 여전히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소리. 기해년에 태어나 다시 기해년을 맏은 사람의 소리. (p.300)

언제든 갈 수 있어서 두번은 가보지 못하는 다른 많은 장소처럼. (p.301)


「점등」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무엇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까지 하는 걸까? 사람을 살게 하는 건 무엇이고 죽이는 건 또 무엇일까? 내가 사랑한 사람이 다른 누구 때문에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면 그 사람이 죽어서 안타까울까? 아니면 배신감으로 미울까?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 결국 나쁜 게 아닌가?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런 저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너를 살게 하는 건 무엇이니? 너의 삶을 무너뜨릴 만큼 강한 존재가 있니?'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눈으로 만든 사람》 겉표지에서


9편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이야기들이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상황이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사는 세상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있어야 자세히 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그 속이 읽힐 테니까. 은유 쌤이 말한 '붙들고 들어가는 힘'을 발휘해보고 싶다. 메티포라 10기는 최은미 소설 《눈으로 만든 사람》을 읽고  '관계'에 대해 글을 썼다. 그 관계로 인해 달라진 나를 생각해보는 글쓰기다. 남편, 장태일 선생님, 나의 첫사랑, 그리고... '구질구질'하게 써내려갈 수 있는 관계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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