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eline Aug 04. 2023

아빠라는 이름

가족에 대한 단상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나에게 단 한 번의 화도 큰소리도 없었던 나의 아빠. 어릴 적 기억에 남는 것은 외출 후엔 맛난 간식보다는 손에 세계명작동화를 한 권씩 사다 주셨었다. 난 키다리아저씨를 읽고 또 읽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지켜 줄, 보호해 줄 누군가를 어린 나이 무의식 속에 절실히 원했었던 것 같다.


아빠가 쓰러지셨었다. 다행히 그날은 일주일 두 번 아빠집을 찾아가는 아줌마가 오시는 날이라 그분이 아빠를 발견하고 남동생에게 연락을 하셨다. 나의 전화기는 늘 무음이다. 산책과 운동 겸 감자와 작은 언덕을 오를 요량으로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화기를 확인하니 아바마마라는 표시가 두 번이 있었다.  아빠집에 도착하자 아빠는 물을 찾으셨다. 아줌마는 어딜 갔냐고 했더니 도가니탕을 사러 갔단다. 병원으로 모셔야지 웬 도가니탕이냐고 타박을 하자 그게 드시고 싶었단다. 아빠를 바로 병원으로 모시려 했지만 아줌마의 가방이 집에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가니탕을 만들어 오시는 건지 전화도 받지 않으시고 내가 도착 후 두 시간 만에 땀범벅인 아줌마가 들어오셨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참았다. 집에서 토마토를 갈고 반찬을 챙겨 오셨다. 그 맘을 생각하니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빠가 병원에서 수액을 맞는 동안 집으로 돌아와 정리를 대충 하고 옷가지와 필요한 것들을 챙겨 와 나의 집으로 모셔왔다. 다행이다. 식사를 한 그릇 다 드셨기 때문이다. 탈진이란다. 무더위 식사를 챙기지 않으시고 혼자라는 외로움에 몰두한 결과이다. 삼일을 머물고 집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아빠는 저녁부터 손을 떠시고 식사를 못하신다. 혼자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고 무서우시단다. 나는 보다 못해 당분간 나의 집에 머무르시라고 하자 금세 표정이 바뀌셨다. 이모네 오빠집 밭에 태어나 처음으로 장화를 신고(뱀이 있다고 한다) 들어가 뙤약볕 아래 호박잎과 여름반찬거리를 들고 땀범벅으로 씻지도 못한 채 아빠가 좋아하시는 (엄마가 없으시니 드시지 못하던 반찬이기에) 호박잎을 찌고 된장찌개와 반찬들을 해 드렸고, 아빠 집의 이불을 모두 들고 와 빨았다. 향기가 폴폴 나게. 그리고 옷과 살림살이도 다시 챙겨 드렸다. 현재 엄마의 제사 또한 내가 지내고 있다. 그러나 형부의 괜찮으시냐는 전화에 내 얘기는 한 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어린애는 아니나 고마웠다는 말이 그리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 스쳤다. 그냥 그거면 됐다. 도리를 다 했으니까. 내 나름의 자식으로서!



평생 누군가를 위해 애를 쓴 적이 없다. 이기적이다. 몸 노동을 하신 적도 자식들 학비를 위해 아무것도 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렇다고 아빠가 막무가내 폭군? 이거나 남성우월주의자는 절대 아니시다. 언변과 사리분별이 뚜렷하시고 차분하고 재미있으시다. 또한 지역선거가 있을 땐 후보자들이 가장 먼저 인사를 한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누구의 딸이라고 하면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다 아는 그런 아빠이시나 가정에서 아빠는 지금도 애기노인이시다. 엄마는 소녀! 아빠는 애기! 그 모습을 50년이 넘도록 지켜본 나는 가끔 지친다. 아빠의 어리광 다 받아줘야 하며 평생을 삼시세끼 따듯한 밥과 다른 반찬을 드려야 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갑자기 화가 불끈 쏟기 때문이다.


난 좋은, 착한 그런 딸로 살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몇 번의 다툼이 있었다. 뒤늦게 아빠의 실체를 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느끼고 싶지 않다. 아빠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에 군소리 없이 잘 따라 주었던 바보 딸을 향한 마음이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직장도, 결혼도 모두 아빠 마음대로 정한 대로 살아갔었다. 파파걸! 그걸 거부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모든 가족이 아빠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만이라도 부모 곁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이상의 효심? 과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지금의 나를 보면!


더위를 못 견딘 감자는 떡 실신 중이다

가끔 뻔뻔하다는 생각도 든다. 평소엔 나 없이 다른 형제들과 식사도 하시고 여행도 즐기시면서 정작 본인이 급할 땐 늘 나를 찾기 때문이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서울에 정착한 다른 형제들보다 쉽게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나 이젠  힘들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다. 다른 형제들이 고향을 떠날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나 내가 떠나려 할 때 끝내 나를 붙드셨다. 그  손을 뿌리치고 서울로 떠났으나 결국 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술을 드신 날이면 늘 나의 집 전화기벨은 울렸다. 모두 잠든 밤, 새벽 시간이나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지금 나의 집 거실에 누워 계신다. 지난번 하노이 여행 후 감자의 눈곱이 눈을 다 덮을 만큼 나와 병원엘 걸어 다녀왔더니 땀범벅인 내가 에어컨을 켜는 순간 추우시단다. 결국 난 방의 벽걸이 에어컨을 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래도 저래도 내가 하는 일은 맘에 들지 않으시면서 내 집을 찾는 아빠! 난 호구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나의 아빠이기에 도리는 다 해야 하니.


나의 아빠는 귀한 집 도련님이셨다. 87살의 나이에 백일과 돌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동경제국대학을 나오신 재원으로 조선땅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게 하신 장본인이셨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변요한 보다 더 멋쟁이에 생기고 귀티 나던 나의 할아버지는 사진으로 지금 남아있다. 그런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셨으니 그 사랑이야 오죽했을까? 그러나 할아버지는 6.25 전 북쪽에 출장을 가셨다 남한으로 넘어오던 중 전쟁으로 돌아가셨다.

나의 첫 얼갈이 김치. 삶은 감자와 빨간고추룬 갈아 넣었다. 아빠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 맛이 안들어서인가?

며칠 전 아직도 귀한 도련님이라 생각하시는 아빠께 "아빠! 나 안 되겠어. 이 집 팔고 다 정리해 아빠가 찾지 못할 유럽 어딘가로 떠나 좋은 놈 만나 다시 결혼이라도 할까 봐  아빠 생각은 어때?"

"아이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근데 남자라는 게 말이여 그놈이 다 그놈이야 뭔 결혼이야. 그냥 지금처럼 살아" 쓸데없는 농을 던졌더니 돌아오는 답은 본인이 생을 마칠 때까지 곁에 있어야 한다는 답!


아빠는 내일쯤 집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앞으로 더 이기적이고 나쁜 딸로 살려한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나에겐 의미가 없다. 내가 살아야 내 아이들을 건사하고 내가 행복하고 스스로 챙기는 힘이 있어야 내 아이들에겐 나와 같은 상처가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가 점점 미워진다. 그리고 애처롭다. 아직도 어른으로써 독립을 못한 어른 아니 노인이라는 사실이.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