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늪에 빠질 뻔한 나는, 레이와 말이 그리고 남편덕에 가까스로 일상을 되찾았다.(17화&18화)일도 다시 열심히 했다. 2021년, 나는 계약직과 프리랜서 일을 병행하며 돈을 벌었다.집을 사겠다며 아빠에게빌린 5천만 원도 모두 갚았다.(13화) 그러고도 꽤 많은 돈을 모았다. 난생처음 생긴 목돈을 어디에 쓰면 좋을지 고민했다. 선배부부나 직장상사 등 여럿에게 조언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했다. 오피스텔을 사라, 주식을 해라 등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남편 또한 주식모임에 가입해 한창 여기저기 맛보기 투자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청개구리 습관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피아노를 배웠는데, 중학생 때부터 입시반으로 옮겨서 제대로 준비해 보라고 하니 '그런 목적으로 배우긴 싫어'라고 말하고는 오래 배운 피아노를 그만뒀다. 그리고 공부도 곧잘 해서 비평준화 지역 내 상위권 고등학교로 진학했더니 '다들 왜이렇게 치열하게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는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문제로 부모님이 학교에 소환을 당하기도 했다. 솔직하게 첫 번째로는 남들만큼 무언가에 올인할 용기와끈기가 부족했고, 두 번째로는 목적 없이 그냥 남들이 걷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 싫었다.
하지만 한 가지 자신 있는 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거였다. 나는 레이와 함께 강화도를 종종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서울 시내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주차하기도 편했다. 내 기준, 강화도는 서울근교에서 가장 시골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도(島)' 섬이 주는 고립감이 나에게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강화대교를 건넌 후 4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드넓게 펼쳐진 논밭이 보이는, 찰나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봄과 여름에는 푸릇하고 가을에는 노랗고 겨울은 하얀 풍경이 펼쳐지는 구간이었다. 나는 그 길을 지금도 매우 좋아한다.
그래, 나는 강화도에 땅을 살래.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그렇게 결심했다. 남편을 제외하고 모두가 놀랐다. 남편은 나를 강화도에 빠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돈이면 대출부터 갚든 생산적인 곳에 투자를 하라며 나를 말렸다. 모든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진다. 이는 결혼을 하면서 새롭게 정립한 나의 가치관이었다. 나는 마음을 굳힌 후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때부터 유튜브, 블로그, 카페로 소형평수 토지를 여기저기 알아봤다. 시작부터 100평 이상의 땅을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대신 100평 미만의 토지는 매물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몇 시간 전에 올라온 따끈따끈한 부동산 글을 발견했다. 1박2일 짐을 싸서 강화도로 달려갔다.
부동산 중개인이 데리고 간 땅은 흔히 농막촌이라 부르는 마을 안 마지막 남은 매물이었다. 10팀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지내고 있는 동네였다. 내가 본 땅은 직사각형, 정사각형도 아닌 장화모양처럼 생긴 토지였다. 땅모양도 그렇지만 원주민들의 마을과 멀찍이 떨어진 농막촌이라는 게 그렇게 끌리진 않았다. 물론 외지인을 환영하지 않는 마을도 있어서 각자 장단점이 있긴 했다. 나는 어르신들이라도 원주민과 소통하며 지내는 걸 선호했다.
"지금 보여드린 땅이 젊은 분들도 많고 강화읍이랑도 가까워서 추천드리는 매물이긴 한데, 땅모양 때문에 그러시면 다른 땅 1곳을 더 보여드릴까요?"
부동산 중개인이 그렇게 추천하진 않는다는 땅을 보러 갔다. 교동도 인근까지 들어가야 하는, 조금 깊숙한 곳에 있는 땅이었다. 마을 안에 방치된 논밭을 개간 후 필지분할을 해서 팔고 있었다. 농막 3~4개가 막 들어온 듯 어수선하고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곳이었다.
"여기는 젊은 분들도 없고 다들 농사 목적으로 들어온 거라 잘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직사각형으로 땅들이 잘 분할되어 있었고 허허벌판에 있던 농막촌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결정적으로 마을부터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가 나왔다. 철조망이 쳐져있었지만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어차피 소형평수의 땅은 찾기도 어렵고 고민하는 사이에 팔리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매매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다시 그 마을을 찾았다. 사실 땅도 땅이지만 동네 자체가 참 조용하고 깔끔했다. 버스정류장도 있었는데 그 옆에 정자가 너무 예뻐서 거기 앉아 김밥도 먹었다. 마을 뽑기 운도 좋았는지 기초공사, 수도, 전기, 농막까지 모든 작업을 하면서 한 번도 클레임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젊은 사람이 여긴 웬일이냐며 지나가는 어르신들마다 반겨주셨다.
남편은 5도2촌까지는 동의했지만 땅을 가꾸는 일에는 회의적이었다. 시골집인 경북 예천에서 본 농사가 지겨웠기 때문이다. 나는 귀찮은 일은 내가 할 테니 이곳에서 힐링할 생각만 하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쉬운 일은 없었고 시골의 모든 일처리는 느렸다. 나는 2022년 3월에 땅을 사서 그해 12월에서야 무언가를 시작해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빈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가서 잡초를 뽑으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어서 '끝나기는 하는 걸까?' 후회도 잠시 했지만 완성된 후의 뿌듯함이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종종 평일 낮에 그곳에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돌아오곤 한다.
겨울에 물이 얼어 뜨거운 물을 바깥 배관에 붓던 일도, 남들은 쉽게 키운다는 대파와 방울토마토가 금방 시든 일도, 여름에 2주를 못 갔더니 허리까지 잡초가 자랐던 일까지 다양한 시행착오와 함께 많은 추억이 쌓였다. 나는 결혼을 하고 많은 일들을 겪으며 스스로를 가엽게 생각했다. 결혼 전에는 내가 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모든 걸 이루어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살면서 처음 맛본 실패란 감정이었다. 시댁도 남편의 건강도 서울에서 치열하게 사는 내 모습도 무엇하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게 밑바닥을 찍었는데 그때 결혼이 다시 나를 살렸다. 남편의 눈이 안 좋아지면서 운전을 할 용기가 생겼고,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서 반려동물을 키울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빠른 성공보다는 지금의 행복에 더 집중하기 위해 강화도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내 인생에 더 집중해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내스스로가 제일 잘 알듯, 운전과 반려묘와 강화도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지금 쓰는 글을 작년에 쓰려고 마음을 한 번 먹었었다.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지나온 우리의 타임라인을 정리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손만 올리면 그냥 눈물이 흘렀다. 아직 내 마음이 다 아물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글쓰기를 다시 멈췄다. 드디어 글을 써도 눈물이 나지 않는 단단해진 시기가 찾아왔다. 남은 Part3의 글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남편의 건강과 난임에 대해 조금은 깊게 풀어보려 한다. 이 브런치북을 완결할 때 내게 남은 감정이"후련"이라면 더없이 감사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