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설레게 하는 작은 것들

by 김재완

나들이

180이 넘는 거구의 막내가 갓난아기일 때 우리 가족의 전설적인 여름 나들이 풍경은 어렴풋이 기억나고, 설렘은 또렷하다.

엄마는 백숙이 담긴 냄비를 품에 안고 막내는 업은 채 오토바이의 뒤에 매달렸다. 여동생은 아빠 등에 매달렸고, 7살이었던 나는 아빠의 오토바이 앞에 자리했다. 우리 가족은 서커스에 나올법한 자태로 여름 바람을 가르며 냇가로 향했다.


자전거

나는 찬동이 자전거 뒷자리에서 스치는 가로수를 보며 미세먼지 없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옆 반 숙이가 숨을 색색거리며 우리 자전거에 바짝 다가왔다. 이윽고 숙이의 자전거가 우리와 평행을 이루자 얼음공주라 불리던 K와 내가 마주 보게 되었다. 찬동이와 숙이는 마을 동수나무와 성당을 지나는 동안 앞만 본채 페달을 밟았다. 마침내 두 대의 자전거가 동일선상에서 달리게 되자 사춘기 소년과 소녀 사이에는 빅뱅이 폭발했다.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대폭발의 순간이 지나자 K가 나에게 작은 수첩을 내밀었다. 그렇게 그녀의 자전거가 내 마음을 관통했다. 수첩 안에는 네잎 클로버와 볼이 빨개지는 고백이 박제되어있었다.


기차역

고향의 기차역은 시간이 지나며 노선이 줄었고,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쇠퇴해갔지

만 설렘만은 불변이다. 한산하기만 하던 기차역도 명절과 방학이면 호시절의 장

터처럼 붐볐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플랫폼의 노송과 느리게 멈추던 기차.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마중 나온 사람들 속에서 혼자 손을 흔들지 않아 금새 찾아낼 수 있던

아버지. 기차도착 시간에 맞춰 더욱 부산하게 움직일 엄마.

귀향이 주는 설렘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싸이월드

영화 시작 전 심폐소생술을 하는 장면의 광고가 시작되었다. 긴박한 상황이 마무리되며 소생술의 대상은 싸이월드란 걸 알게 되자 반가움과 서글픔이 뒤엉켰다.

광석이형과 싸이월드는 왜 그리 서둘러 떠났을까?

우리는 왜 그토록 먹지도 못하는 도토리를 모아 방을 꾸미고 음악을 바꿨을까?. 대문 글귀를 고쳐 쓰며, 수시로 방명록을 확인 하던 시절의 설렘이 사라진 이유는 그저 싸이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두 번째 만남

30대의 소개팅은 나와 상대가 동시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가는 첫 날의 설렘도 좋지만, 더 좋은 건 다음이다.

마음에 드는 그녀에게 신청한 애프터가 받아들여지고,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가는 두 번째 날의 발걸음이 조금 더 사뿐하다.


쇼핑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고, 가격표를 확인하고 돌아서는 순간의 절망감과 자괴감을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세상사는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며칠 후, 세일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다. 이미 팔려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기우를 안고 잠시 맡겨둔 옷을 가지러 가는 길 위에서 맛보는 설렘이란!


사회정의 실현

40대가 되어도 퇴근 시간 10분전은 여전히 설레며, 금요일 오전 11시가 되면 세상에 대해 관대해진다. 정치인도 아닌데 사내 정치에 몰두하며 업무시간에 임원 방만 싸 돌아다니던 그 인간이 승진에 누락되었을 때 삶의 희열을 느낀다.


식의 찬미

사계절이 주는 기쁨 중 으뜸은 각 계절에 나는 제철 음식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기운을 한껏 품은 제철 음식을 영접하는 순간의 설렘이란!


파주 가는 길

이 모든 순간 중 으뜸은 첫 책의 출간 계약을 위해 파주 출판단지로 향할 때였다. 하늘의 구름이 솜사탕이었으며 거리의 코스모스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러너를 응원하는 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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