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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Sep 16. 2023

깨고 나와야 깨달을 수 있는 것

- 『데미안』 & 그림책



무의식을 보려는 자들



  "새는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


출처 : MBC 《킬미, 힐미》홈페이지


  2015년에 반영한 드라마 《킬미, 힐미》의 주인공 차도현은 다중인격장애, 즉 해리성 주체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차도현은 자신을 포함한 일곱 개의 인격을 갖고 있는데요, 이들은 이름, 성별, 나이, 특성 등이 다 다릅니다. 배려심과 책임감이 강한 차도현, 잔혹하고 폭력적인 신세기, 폭탄을 제조하는 유쾌한 페리박, 끊임없이 자살을 하려는 안요섭, 주변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안요나, 겁에 질린 채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있는 나나, 마법사의 모습을 한 Mr. X가 차도현의 인격들입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차도현을 괴롭힙니다. 특히 신세기는 무척이나 강력합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기는 도현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그는 인격이 아닌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현을 영원히 잠재워야 합니다. 도현 역시 위험한 성격의 세기가 없어지길 바라지요.    


  사실 세기를 비롯한 다른 인격들은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도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신입니다. 무의식 속에 가뒀던 기억의 조각을 맞추며 도현은 그들과 자신이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도현의 비밀 주치의인 오리진도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도현과 자신을 위해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합니다. 차도현과 함께 했던 어린 날에는 어둡고 무서운 사건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좋은 기억도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든든한 가족이 있으니 어떤 아픔에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리진과 도현은 서로가 연결되었던 일곱 살의 자신들을 만납니다. 학대를 받았던 그 시절은 분명 공포와 아픔의 나날이었지만 그 암흑 속에도 밝은 날이 있었습니다. 둘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를 건네며 서로의 아픔을 보듬습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킬미, 힐미》의 차도현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자신과 인격들을 각각으로 보고 자기가 아니라 부정했던 차도현이 그들과 자신이 하나였음을 깨닫고 융합하려 했듯이 싱클레어도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기 안에 있는 밝음과 어둠을 통합하려 합니다. 또 이 둘은 그동안 받았던 교육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려합니다. 재벌 3세인 차도현은 집안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과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집안의 문제를 덮으려고만 했던 가족들과는 달리 잘못한 부분을 바로 잡겠다고 선전포고하지요. 싱클레어는 밝음으로 대변되는 집안과 학교의 가르침이 아닌 자신의 본모습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 고뇌합니다. 억압했던 무의식을 바라보며 온전한 자기를 마주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아프고 괴롭습니다. 싱클레어와 도현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 듯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합니다.  



에밀 싱클레어 = 헤르만 헤세



    10대 때 읽었던 『데미안』은 어렵고 재미없는 소설이었습니다.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는데 헤르만 헤세의 그림을 본 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글만 쓴 줄 알았던 헤세가 정신적인 고통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짧은 글을 읽고는 그가 궁금해졌지요.


  헤르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종교적 신념과 의무를 강요하면서 엄격하게 교육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부모와의 불화를 겪고, 신학교 탈출, 정신병원 입원, 자살 시도 등을 하면서 순탄치 않은 10대 시절을 보냅니다. 고등학교 퇴학 후 그는 시계공장, 서점에서 일합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그는 일을 하면서 글을 썼고, 작가로서 성공합니다. 그는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탄압도 받았습니다. 평화주의자인 헤세는 제1차 세계대전을 비판했고, 그 때문에 조국의 배신자라는 공격에 시달렸지요.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 부인의 정신분열증, 아들의 뇌막염 등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헤세는 융의 제자 링 박사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데미안』을 집필합니다.


  1919년에 발표한 『데미안』의 작가는 에밀 싱클레어입니다. 에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전쟁을 반대하는 헤르만 헤세에게 쏟아진 비난이 엄청났기에 그는 본명으로는 책을 출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은 이 작품에 열광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요. 덕분에 작가에게도 관심이 쏠립니다. 사람들은 에밀 싱클레어가 누구인지 궁금해했고, 작가가 헤르만 헤세라는 게 알려지자 1920년부터는 본명으로 책을 냅니다. 융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방황하고 절망하는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통해 인간의 심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지요.



창 안 쪽의 세계와 창 너머의 세계



  『데미안』은 화자인 싱클레어가 열 살 때 도시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시절 싱클레어는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로 대변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싱클레어의 내면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었지요. 그곳은 끔찍하고 추잡하고 무시무시하지만 유혹적입니다. 자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보다는 어두운 세계에 더 끌립니다. 열 살이 지났을 때, 싱클레어는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프란츠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힙니다. 꿀리고 싶지 않아 지어낸 거짓말로 크로머에게 협박을 당하면서 이젠 밝은 세계가 아닌 금지된 세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만난 데미안은 더는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못하게 합니다. 데미안은 어린아이에게 볼 수 없는 어른스러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인물입니다. 카인과 아벨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서 싱클레어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지요.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밝음과 어둠,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데미안뿐 아니라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에바 부인도 싱클레어에게 영향을 줍니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싱클레어는 혼란과 방황을 반복합니다. 알에서 깨어나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길은 무척 고독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제이콥이 내다보고 있는 이 길은, 제이콥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 창 너머 -




  『창 너머』의 주인공 제이콥의 집 안은 햇살이 들어와 밝고 따스합니다. 하지만 바로 옆 장면에 있는 제이콥의 집 밖으로 보이는 창문은 차갑고 창백합니다. 커튼 사이로 일부만 드러난 제이콥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합니다. 맞은편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가 제이콥의 이마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마치 죄를 짓고 그 벌로 이마에 십자가를 새긴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이마에 십자가를 새긴 채 죄를 짓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밝은 세계보다는 어두운 세계에 이끌리면서 불안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싱클레어를 보는 느낌입니다.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인 찰스 키핑의 작품은 어둡고, 우울하고, 몽환적이고, 신비롭습니다. 그의 그림은 섬세하면서 힘 있고, 기괴하면서 뭉클하고, 강렬하지요. 어린 시절에 병약했던 그는 집안에만 있었다고 합니다. 몸집이 작고 약한 그를 부모는 지나치게 보호하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때의 외로움과 우울이 『창 너머』에 녹아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창 너머』는 거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는 제이콥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만 밖을 바라보기에 그 장면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장면마다 커튼이 젖혀진 상태가 다르기에 그때마다 볼 수 있는 범위도 달라지지요. 커튼은 볼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기도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가리는 역할도 합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제이콥의 표정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이콥이 있는 거실은 노란빛이 감돌아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창문 밖은 따뜻함만 있지 않습니다. 매정할 정도로 차가운 푸른색이 있고, 불안과 공포를 대변하는 붉은색이 있습니다. 창백하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황량하기도 한 거리의 모습은 제이콥의 감정에 따라 색이 달라집니다. 창 밖에는 결혼식도 하고 장례식도 하는 교회, 말이 끄는 짐마차가 몇 대 남아있는 양조장, 맛있는 과자가 있는 알프네 과자 가게, 거리를 청소하는 위레트 씨, 사람들한테 침을 뱉는 조지, 비쩍 마른 개와 그의 반려인 쭈그렁탱이가 있습니다. 조용하던 길에 갑자기 비둘기들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3인칭 시점은 1인칭 시점으로 바뀝니다. 다음 장면은 양조장에서 뛰쳐나온 말들이 질주하는 모습입니다. 붉은색으로 긴박하고 불안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뒤이어 마부와 양조장 사람들이 뛰어가고, 위레트 씨와 쭈그렁탱이도 보입니다.


  제이콥은 창문으로 보이는 일부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창 너머의 세상을 상상합니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아직은 어린 제이콥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생각하고,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 왜곡합니다. 이 그림책을 읽는 독자들도 추론하고 상상해서 채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제이콥 스스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건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나갈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쭈그렁탱이라 불리는 노인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이콥이 조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질투 때문은 아닌지, 말들이 왜 양조장에서 뛰쳐나왔는지, 쭈그렁탱이가 고개를 숙인 채 개를 꼭 껴안은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물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에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요. 앞뒤 장면, 인물들의 동작, 색채 등으로 짐작하고 판단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읽은 이들의 의견과 감정도 제각각입니다. 누군가는 제이콥이 몸이 불편해서 나갈 수 없다고 하고, 누군가는 제이콥이 집 밖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제이콥이 아직 어리기에 죽음을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있다, 창 밖만 바라보는 게 가엾다 등의 의견과 달리 타인을 훔쳐보는 모습이 음흉하다, 자유롭게 밖을 다니는 조지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게 비겁하게 보인다, 죽음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이 편하고 싶어 모르는 체하는 거다 등의 의견도 있지요. 저는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적인 요인으로 제이콥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창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그곳에 있고 싶은 열망이 분명 있지만 그보다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해 보였어요. 그래서 소동이 일어나는 밖을 보면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하는 대사가 뜬금없으면서 적절했지요. 쭈그렁탱이 개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편한 대로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고요. 그래서 유리창에 제이콥이 그린 그림에 나타난 상반된 감정이 자꾸만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비겁함이 보였거든요. 어린아이라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제 마음은 너그럽지 않더라고요. 제이콥을 통해 저를 봤기에, 제 마음을 제이콥에게 투사했기에 그렇겠지요.


  이런 아름답고도 끔찍한 일들이 사방에 있었다.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 있었다. 말단 경찰과 부랑자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녔으며, 술에 취한 남자가 아내를 두들겨 패고, 저녁이 되면 공장에서 젊은 아가씨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노파는 사람들에게 마법을 걸거나 병이 들게 할 수 있었으며 숲에는 도적 떼가 살고 있었고 방화범은 경찰에 붙잡혔다. 이 두 번째, 격렬한 세계는 어딜 가나 넘쳐 나고 냄새를 풍겼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우리 집 방만 빼고는. 이곳에 평화, 질서와 평온, 의무와 양심의 가책,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그리고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것, 어두운 것과 폭력적인 것이 존재하지만 한달음에 어머니의 품으로 피신할 수 있는 것 또한 경이로웠다.
  가장 기이한 것은 이 두 세계의 경계가 맞닿아 있고 너무나 가까이에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 데미안 -



  아버지로 대변되는 밝은 세계를 거부하고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싱클레어는 굴욕과 공포를 느낍니다. 동시에 아버지보다 우월하다는 감정도 생기지요. 그리고 데미안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밝음과 어둠은 분리된 게 아니라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밝은 세계보다 어두운 세계에 이끌리면서 불안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싱클레어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차츰 벗어납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자신의 낡은 세계를 깨고 나오기 위해 애쓰지요. 거실에 앉아 밖을 보면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말하는 제이콥도 데미안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오면 좋겠어요. 제이콥이 좁은 공간에 앉아 편협한 시선으로 밖을 보지 않기를, 보기 싫다고 해서 커튼으로 막지 않기를, 창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 직접 몸으로 부딪히기를, 그 경험을 토대로 의식 너머의 무의식을 알아가기를, 진정한 자신을 만나면서 타인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결국 또 이렇게 그림책 속 인물을 빌려 저에게 당부하고 있네요.  



나를 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



  모든 사람의 삶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좁을 길로의 암시다. 일찍이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은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쓴다.

  - 데미안 -



나는 더 반짝이는 것을 찾아
물들고, 또 물들었어요.

- 나를 찾아서 -



  지금은 저를 알아가고 있지만 예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너무 무지했으면서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제 안에 어떤 빛이 있는지 모른 채 다른 이의 빛만 쫓아다녔지요. 다른 이의 빛을 흡수하더라도 제 고유의 빛깔을 바탕으로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이의 빛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죠. 그래서 저는 참 많이 부족하거나, 어딘지 이상한 아이가 되었어요. 『나를 찾아서』를 읽는 내내 그때의 제가 보였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빛을 찾아다니며 빛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이 꼭 저 같았습니다. 더 반짝이는 것을 찾아다니며 그 색깔에 물들고, 또 물들어 가는 주인공처럼 저 역시 다른 이들의 것으로 저를 채우려 했지요. 너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무서운 눈들의 말을 부정한 주인공처럼 저 역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쁜 것만으로 채우려 했고, 언제나 반짝이고만 싶었어요.   


 『나를 찾아서』의 주인공은 분홍빛의 바다를 무리와 함께 헤엄칩니다. 모두가 비슷한 크기, 비슷한 생김새, 투명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신비로운 빛을 발견하고 무리에서 이탈합니다. 자신에게는 없는 그 빛처럼 반짝이고 싶어서죠. 주인공은 원하는 대상에게 입을 맞추면서 몸의 색을 바꿉니다. 별나게 생겼다는 비웃음을 믿지 않은 채 주인공은 더 반짝이는 것을 찾아다닙니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물들이고 물들이던 어느 날, 주인공은 무서운 눈들에게 갇히고 맙니다. 무서운 눈들은 주인공에게 너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아니라며 도망친 주인공은 이번에는 거울들이 가득한 곳에 갇힙니다. 거울을 통해 진정한 자신과 마주한 주인공은 그 아이와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색들을 뱉어내기 시작합니다.



  『나를 찾아서』의 작가는 "내면의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잊은" 주인공을 통해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빛을 지니고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그림책의 주인공처럼 다른 이를 따라 하기도 하고, 똑같아지려 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을 거예요. 모방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니까요다른 이를 따라 하면서 나와 맞지 않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고, 나만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몰두해 나를 잃어버린다면 삶의 의미 또한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른 이의 뜻대로만 한다면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지요.


  헤르만 헤세는 부모의 강요와 사회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데미안』을 통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생각을 주입하고,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데도 알을 깨고 나와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락사스는 신인 동시에 악마입니다. 성스러움과 추함, 공포와 환희,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여자와 남자가 뒤섞인 아브락사스는 인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완벽하게 선하고 깨끗한 신의 뜻을 제대로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신의 뜻에 맞게 살려하지요. 그러니 늘 죄인이 되어 불안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락사스는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를 깨달으면서 자신 안에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나를 찾아서』의 주인공도, 『데미안』의 싱클레어도 그 험난한 여정을 통해 결국 자신과 마주합니다. 다른 이의 색깔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를 거부하고 인정하면서 온전한 자신이 되어갑니다.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과정이었던 거죠.



스스로 깨거나, 남에 의해 깨지거나



나는 그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데미안 -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면 새가 되지만 남이 알을 깨 주면 프라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내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격하게 공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알 속이 편안하다면 굳이 그것을 깰 필요가 있는지, 평생 알 속에서 괜찮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왜 그토록 힘들게 알을 깨야만 하는지 의문이었지요.  


  그 당시 저는 정체성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저를 만들면 된다고 확신하면서 보여주고 싶은 저를 설정하고는 거기에 끼워 맞추려 했습니다.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저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려 했으니 늘 좌절만 하게 되더라고요. 제 허물은 더욱 비대해졌고, 세련되고 능숙하지 못한 거짓은 점점 어설프고 우스운 꼴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 자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어야 했습니다. 제 것이 아닌 세계를 파괴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타인의 반응만 민감하게 살피며 더 견고하게 남의 것을 갖다 붙였지요. 그래서 눈치를 많이 보는데도 눈치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어둡고 부족한 부분을 숨기려 애쓸수록 어둡고 부족한 사람이 되어갔어요.


  창 너머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창 밖을 나서야 한다는 것도, 나를 찾기 위해서는 험난한 길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스스로 깨지 않으면 남에 의해 깨진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데미안이 필요한가 봅니다.


  서로에게 데미안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서유리 옮김, 추혜연 그림, 위즈덤하우스 펴냄

* 『창 너머』, 찰스 키핑 지음, 박정선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 『나를 찾아서』, 변예슬 지음, 길벗어린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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