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했어요.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어요. 몇 장 읽다가 덮어버린 날이 대부분이었고, 아예 책을 펼치지 않은 날도 많았지요.
제 기억 속 이 소설은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와 문장을 지녔거든요. 다음 장면이 궁금했지만 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하느라 심호흡을 한 후에야 책장을 넘겨야만 했었지요. 그 오래 전의 기억을 재현하고 싶었는데 지지부진했습니다. 130쪽 남짓하는 소설을 한 달 보름 동안 읽었다니까요. 너무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라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더라고요. 제 기억과 실제 내용이 달랐는데도 놀랍지 않았고요.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는데 노인이 바다 생물들과 힘겹게 싸우듯이 저도 이 책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노인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만큼 힘은 없지만 지금은 경험과 요령이 있다고 했듯이 저 역시 그때는 알지 못했던 삶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요.
그런데 또 이상했어요. 지루하고 재미없는데 새기고 싶은 문장은 너무 많았습니다. 몇 개는 필사를 했고, 나머지는 자판을 두드렸어요. 입력하면서 읽느라속도가 더 더뎠지요.
망망대해에서 벌어지는 이 다급하고 절박한 이야기가 왜 지루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을 놓지 못하겠는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문장을 외우고 싶어 안달하는지, 따분함을 느끼면서 왜 마음이 아프고 심장이 뛰는지, 다음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조바심이 날 정도로행복한 결말을 바라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심장은 뛰는데 지루했던 이유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다만 더 이상 운이 없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
- 노인과 바다 -
책을 읽는 내내 삶은 바다를 건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튼튼한 배, 근사한 장비, 수많은 동료들, 해박한 지식과 지혜 등으로 무장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작고 허름한 배에 몸을 맡겨야 할 테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쳐야 합니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도 있을 테고, 먼 곳으로 떠나는 이도 있을 겁니다. 도달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분명히 알다가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태풍을 만날 것이고, 때로는 온화한 날씨 덕을 볼 것입니다. 상어의 습격이 평생 고통을 주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고,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모험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미워하는 사람마저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 든든하지만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 힘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요. 소년이 옆에 있기를 바라지만 노인 혼자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듯이 분명 삶에는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하지요. 책을 읽는 내내 그 사실이 무섭게 다가왔습니다.
그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지겹다'는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일이 잘 된다고 기대하가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하다가도, 설레고 초조하고 즐겁고 긴장되는 중에도 지겹다가 따라왔습니다. 『노인과 바다』의 장면마다 감탄하고, 행복한 결말을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그 이야기가 지루했던 이유는 제 삶의 태도가 그렇기 때문이었죠.
절대로 삶이 시시하거나 하찮아서가 아닙니다. 너무 거대하고 막막해서 그런 거예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만 원하기에 행복으로 가기 위한 고단한 과정은 삭제하고 싶거든요. 제가 원하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청새치를 제압하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다시 행운이 돌아왔다고 기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더는 그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청새치와 힘겹게 사투를 벌인 후에 끝났다 싶었는데 상어 떼의 습격을 받는 상황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삶의 힘겨운 시간을 건너뛰고 잘 살고 있다는 부분만 원하다 보니 조마조마한 중에도 지루하고 지겨울 수밖에요.
삶이라는 바다를 거칠게 헤엄치고 싶었던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작품 중 처음 읽은 소설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는 한동안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지 되뇌며 다녔지요.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를 연달아 읽고 나니 그가 던진 질문이 너무 묵직해서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삶까지 보태져서 맑은 하늘을 볼 때면 괜히 서러워지기까지 하더라고요. 스물셋을 지나는 제게 헤밍웨이는 작가로서는 웅장하고 멋있는 산이었고, 인간으로서는 안타까움 그 자체였지요.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사진을 보면 긴 머리에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습니다. 남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던 헤밍웨이에게 여자 아이 같았던 시절이 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당시에는 아기들에게 성별과 상관없이 여자 아이의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어머니와는 죽을 때까지 불화를 겪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헤밍웨이는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복싱과 투우 등 격한 운동을 배웁니다. 위험한 모험을 즐기고, 스페인 내전과 두 번의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심한 부상을 입습니다. 수많은 여성을 만나고, 불륜을 맺고, 네 번의 결혼을 하지요.
그는 복싱장에서 파트타임을 하고, 공원에서 비둘기를 잡아먹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글을 씁니다. 드디어 작품이 인정을 받고,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계속해서 불운이 찾아옵니다. 독감에 걸리고,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말을 타다 떨어지는가 하면, 치질이 재발하고, 탄저병에 감염되지요. 48시간 만에 연달아 일어난 비행기 사고, 산불로 인한 화상, 아버지의 자살, 친구들의 죽음, 자신과 가족들에게 계속해서 닥친 사고와 건강 문제 등으로 그의 우울증은 악화됩니다. 폭음을 하면서 고혈압, 당뇨, 비만, 두통, 염증 등에 시달리게 되고,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편집증세까지 보입니다. 결국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권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작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성을 얻었고, 남성으로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뜻하지 않게 발생한 사고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거침없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요. 헤밍웨이 집안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는 유전적 이유일 거라 추정하고 있는데 그의 다혈질인 성격도 이와 관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소문난 바람둥이에, 질투심 때문에 호텔 화장실 변기에 총을 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하는 헤밍웨이는 그야말로 개망나니이지만 작가로서 그는 깊이 있는 눈으로 삶을 꿰뚫고 있습니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깊은 바다 위에서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을 통해 삶이 주는 고난을 헤쳐나가는 인간의 위대함을 담고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1952년에 발표된 중편소설입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1953년에 퓰리쳐상을,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지인이자, 쿠바인인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1897~2002)가 실제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창작했습니다. 헤밍웨이의 특징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문체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헤밍웨이의 문체는 정확하고, 간결합니다. 화려한 수식어나 미사여구도 거의 없습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의 행동이나 모습으로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헤밍웨이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짧은 문장만으로 삶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입니다.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죠. 사람들은 그의 운이 다 했다고 말합니다. 노인을 따르는 소년 마놀린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더는 노인과 배를 타지 못하게 막습니다. 노인 역시 자신에게 운이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줄을 정확하게 드리울 수 있다며 그게 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행운이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으니까요. 노인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믿으며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드디어 낚싯줄에 물고기가 걸립니다. 엄청나게 큰 청새치와의 사투는 이틀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노인은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다가도 세월이 쌓은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자랑하기도 하고, 소년을 그리워하다가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노인은 바닷속 생명에게 미안함과 경외감을 가지면서도 자신이 어부임을 잊지 않습니다.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물고기와의 싸움이 끝납니다. 노인은 청새치의 크기에 놀라며 그것을 배에 묶고 집으로 향합니다.
슬기로운 장비 활용법
노인이 있던 바다 위에 제가 있다고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빠집니다.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의지보다는 못 하겠다며 단념부터 할 것 같거든요. 제게 어떤 무기가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따지지 않은 채 제게 없는 능력과 장비 탓만 하겠지요. 『노를 든 신부』의 신부와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장비와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확장했는데 저는 겁에 질려 원망과 후회만 하다가 끝나겠구나, 싶었지요.
신부가 된 소녀는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조금 긴장되었지만, 새로운 마음이 들어 설레었습니다.
- 노를 든 신부 -
『노를 든 신부』의 소녀는 노 한 자루와 드레스 한 벌만으로 집을 나섭니다. 친구들이 신부와 신랑이 되어 섬을 떠났으니 소녀 역시 신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신부는 잔뜩 기대를 하고 바닷가로 가지만 노가 하나밖에 없어 배를 타지 못합니다. 신부는 자신을 태워줄 배를 찾지 못하자 바닷가를 떠나 산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태워줄 배를 만나지만 이번에는 신부가 거부합니다. 그 배들을 탈 바에는 차라리 심심한 게 낫다면서 말이죠. 그러다 늪에 빠진 사냥꾼을 만납니다. 신부는 사냥꾼 덕에 자신의 노가 쓸모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노는 배를 타기 위해 필요한 도구가 아닙니다. 노로 과일을 딸 수 있고, 요리를 할 수 있고, 결투도 할 수 있죠. 신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노 한 자루를 잘 활용해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노 하나로는 배를 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저는 분명 절망했을 겁니다. 노를 하나밖에 주지 않은 부모를 원망했을 것이고, 왜 내게는 노가 하나밖에 없냐며 슬퍼했겠지요. 노 하나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기 전에 쓸모없는 물건이라며 버렸을 수도 있어요. 혹은 나머지 하나를 얻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포기했을지 모르고요. 하지만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다릅니다. 어깨가 과하게 부푼 소매와 치마가 너무 길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도 씩씩합니다. 가진 게 없어 안 된다는 말을 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탈 수 있는 배를 찾지요. 아니다 싶으면 당당하게 거부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노의 쓰임을 발견하고, 여기에서 더 확장해서 사용합니다. 신부는 남들이 정해주는 길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끝까지 유쾌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죠.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한 주인공의 성격처럼 그림도 시원시원합니다. 굵직한 선은 거침이 없고, 색도 강렬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인공을 '신부'라는 호칭에 가두고 싶지 않은데 끝까지 그녀는 신부로 불리네요.
“칼을 갈 숫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노인은 노 끝머리에 칼을 묶은 줄을 점검하고 나서 말했다. “숫돌을 갖고 왔어야 했어.” 갖고 왔어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보게 늙은이, 자넨 이미 그것들을 갖고 오지 않았어. 지금은 없는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있는 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그거나 생각하도록 해.
- 노인과 바다 -
"아직 갈고리가 남아 있어." 노인은 말했다. "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노 두 자루와 키 손잡이, 그리고 짧은 몽둥이도 아직 있어." 이제 놈들한테 내가 진 셈이군, 노인은 생각했다. 몽둥이로 상어를 때려죽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하지만 노와 몽둥이와 키 손잡이가 있는 한 끝까지 해볼 거야.
- 노인과 바다 -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작은 돛단배를 타고 홀로 바다로 향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힘이 무척 센 흑인과 팔씨름을 해서 이겼지만 이젠 손에 자주 쥐가 납니다. 힘은 예전 같지 않고 운도 다 했는지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납니다. 노인은 사투 끝에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큰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노인은 청새치의 가격을 계산하기도 하고, 이게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면서 집으로 향합니다. 순조롭게 항해를 하고 있는데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달려듭니다. 한 놈을 물리치면 또 한 놈이 나타나고 또 나타나기를 반복하죠. 그 과정에서 노인이 잡은 청새치는 상어들에게 다 뜯겨나가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잃습니다. 노인은 소년이 옆에 있으면 하고 바라다가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갖고 있지 않은 도구를 아쉬워하다가도 갖고 있는 것들을 이용해 최선을 다합니다.
신부와 노인, 그들은 약점을받아들이면서 강점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장비를 본래의 쓰임보다 확장할 수 있었던 건 삶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 덕이었습니다. 신부는 노가 하나밖에 없다며 낙담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태워주는 배가 아닌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삶을 개척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물고기들과 사투를 벌였고, 승리를 한 후에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뼈만 남은 물고기와 함께 돌아와 패배를 인정할 때에도 겸허하고 담담했습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떤 장비를 갖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장비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거죠.
삶이라는 링 위에서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 생각처럼 쉽지 않네.
- 가드를 올리고 -
사전을 검색하니 권투에서 가드는 "선수가 상대편의 주먹을 막기 위하여 취하는 팔의 자세"라고 나옵니다. 자신을 보호하면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하지요.
『가드를 올리고』는 빨간 글로브를 낀 선수와 검은 글로브를 낀 선수의 결투를 산에 오르는 과정과 맞물려 표현하고 있습니다. 글은 산을 오르는 고단함과 막막함에 대해 쓰고, 그림은 링 위에서 처절하게 싸움을 벌이는 두 선수를 그립니다. 관객은 없습니다. 오로지 '나'와 상대만 있을 뿐이죠. 어느 순간 상대도 사라집니다. 이제부터는 혼자만의 싸움입니다. 내가 뭘 하는지, 다시 올라갈 수 있는지, 길을 잃은 건 아닌지, 바람이 다시 불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 고된 걸음을 멈추고 싶은 '나'를 '나'는 이겨야만 합니다.
링 위에서 벌어지는 결투는 방어할 수 없을 만큼 훅, 들어와 마음을 강타합니다. 목탄화로 거칠게 그린 싸움은 너무 처절하고 치열합니다. 배경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두 선수의 모습만 투박하게 그렸기에 이들의 싸움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박에 오를 줄 알았던 산은 생각처럼 쉽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골짜기, 바위, 웅덩이 등이 나오듯이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링 위에서의 싸움도 지난합니다. 한 대 맞았는데 또 주먹이 날아옵니다. 이제는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보게, 늙은이. 뭔가 즐거운 걸 좀 생각해 보게.” 노인은 말했다. “자넨 지금 시시각각 집에 가까워지고 있어. 또 짐이 이십 킬로그램이나 줄어서 그만큼 더 가벼워졌어." 노인은 배가 해류의 안쪽에 이르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냐, 있어.” 노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노 끝머리에다 칼을 묶어 달 수 있잖아.”
(중략)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노인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난 그건 죄악이라고 믿어. 죄악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 그는 생각했다. 죄 말고도 지금은 문젯거리가 충분하니까.
- 노인과 바다 -
멍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온 자리는 부풀어있지만 주인공은 다시 일어섭니다.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도 그는 다시 가드를 올립니다. 상처와 붓기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져 있지만 주인공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이 일어서기 위한 싸움이기에 만족한다는 듯한 그의 얼굴이 너무 숭고합니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도 이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받아들이면서 끈질기게 투쟁했던 노인의 모습이 가드를 올리는 그의 모습과 겹쳤습니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두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느꼈습니다. 가방을 정리하다가도, 노트북 전원을 켜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그들이 자꾸만 뒤통수를 잡아당겼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극적인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울림이 컸지요.
연결되어 있는 삶
긴장과 재미를 느끼면서도 삶이 지루하고 지겨웠던 건 자포자기와 무기력 때문이었습니다. 행복을 갈망할수록 갖지 못한 상실감과 나는 못 해,라는 패배의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무엇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없다고 확신했죠. 갖고자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갖지 못했다고 실망했고, 있는 것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우겼습니다. 가진 것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는데 장비 탓만 하고 있었어요.맞기도 전에 쓰러지기도 했고, 쓰러진 뒤에는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아 버티기도 했습니다. 건너뛰고 삭제하고 싶은 그 모든 시간들은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한 과정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얻고만 싶으니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지겨울 수밖에요.
무엇보다 망망대해 위에 홀로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그냥 이대로 가라앉고 싶었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 해도 인생은 결국 혼자라고, 스스로 힘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분명 삶에는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쓰니 두려움 때문에 더 무기력해졌지요. 그러다가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혼자만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아요. 비록 옆에는 없지만 노인에게는 힘들 때 떠올릴 수 있는 소년이 있고, 신부에게는 기회를 준 인물들이 있고, 나오지는 않지만 링 위에 선 주인공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다시 일어나 가드를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고 마음을 바꿔보려고요.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 위에 있지만 그 각각의 삶은 연결되어 있으니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요. 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고,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날을 되새겨보려 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과정은 분명 힘들고, 매번 결과가 좋지는 않겠지만 모든 일에 해피엔딩을 바랄 수는 없잖아요. 이젠 당신에게도 제 장비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