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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Sep 04. 2019

패션 테러리스트

나는 결국 포기했다

왁스 하나 바르지 않은 머리, 오래된 책 냄새가 날 것 같은 셔츠, 다림질 안 된 바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런 내 남편의 겉모습에 끌렸다. 꾸미지 않은 소탈함이 좋았다. 남편을 만나기 전 소개팅에 나온 남자들은 잘 가꾼 외모를 과시했다. 나 역시 치장하는 데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그런 남자들에게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반면 이 남자는 겉모습 뒤에 내면의 단단함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훗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걸 알게 됐지만.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없는 남자에게 끌렸다지만, 데이트를 할 때 남편이 가끔 입고 나온 몇몇 옷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옷은 염색이 괴기스럽게 된 티셔츠였다. 연애 초반이라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오빠, 이 옷 되게 좋아하나 봐"라고 말했다. 몇 년이 지나 읽은 '여자어(女子語) 사전'이란 유머글에서 그 말이 곧 "그 옷 좀 입지 마, 쫌!"이라고 해석된다고 했을 때 나는 무릎을 쳤다.


결혼을 한 뒤에는 남편의 뒤떨어지는 패션 감각이 아쉬웠다. '남편의 패션=아내의 센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나는 내 취향에 맞는 옷을 남편에게 선물했다. 남편이 출근할 때마다 머리 손질도 직접 해줬다. 남편은 비교적 만족해했다. 오랜만에 본 아주버님이 남편의 차림새를 보고 "웬일이냐"라며 놀랄 정도였다.


남편이 2박 3일 간 중국으로 출장에 갔을 때였다. 나는 이 기회에 남편의 못생긴 옷들을 처리하고야 말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통이 내 허리만 한 데다 밑단이 끌려서 해진 바지는 처참했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떡볶이 코트, 옷깃이 낡아 빠진 와이셔츠, 싼티 나는 니트는 한숨이 나왔다. 개중에는 새 옷도 있었는데 새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려고 박스에 따로 포장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옷장을 보고는 매우 화를 냈. 내가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고 옷을 함부로 정리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기왕 버려야 할 옷들이고, 아내로서 그 정도의 권한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박스를 열어 옷을 하나하나 꺼내고는 "이 옷은 왜 버리냐?"라며 따져 묻기 시작했다. 나는 답을 하다가 이내 남편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무슨 옷을 버리려 했는지 사후 검열하는 남편을 두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며칠을 대화도 없이 지냈다.

그렇다. 이런 느낌의 셔츠였다.(출처=11번가)

집 안의 냉기가 흐르던 어느 날 마침내 남편이 사과의 손길을 내밀었다. 내가 버리려고 골라 놓은 셔츠 중 하나를 입고 나간 날이었다. 남편의 옷 중에 비닐도 뜯지 않은 모시 재질의 와이셔츠가 있었다. 아무리 새 옷이라지만 할아버지들이 입을 법한 디자인이었다. 손으로 만져봐도 뻣뻣하고 까끌해서 도저히 입기 힘들어 보였다.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새 옷을 버린 나를 욕하며 모시 와이셔츠를 입었을 테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하루 종일 셔츠가 너무 따가워서 일하는 내내 괴로웠다고 다. 새 옷이지만 남편을 위해 버리려 했던 아내님의 깊은 뜻을 몸소 느끼고 나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역시나 뒤끝이 긴 나는 이제는 남편의 패션에 대해 방관하고 있다. 나와 외출을 할 때에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을 쓴다. 순전히 내가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다. 가끔씩 내가 머리는 (눈 뜨고 보기 힘들어) 손질해 주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매우 황송해하며 출근을 한다. 복을 발로 차 버린 남자의 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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