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혼자 와인을 따라서 온다. 그럼 그렇지. 나는 낮은 한숨을 쉬며 컵을 가져와 물을 따른다. 남편은 '아차' 싶었는지 "와인 마실래?"라고 묻는다. 아기에게 모유를 먹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엄청 난처하고 당황했다는 뜻이다. 나는 잔소리를 하는 대신 남편을 빤히 쳐다본다. 남편은 "까먹었다"라고 말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전날 저녁식사를 하기 전 있었던 일이다.
무언가를 먹을 때 '당신도 먹을래?'라고 묻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사소한 배려가 부부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토스트를 굽거나 과일 주스를 만들 때 남편에게 꼭 물어보는 이유다.(사실 묻지도 않고 남편 것을 만들었지만, 물어보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이건 다른 뒷담화에서 쓸 예정이다.) 하지만 내 남편은 여전히 익숙지 않나 보다. 지금은 모유 수유를 하기 때문에 와인을 마실 수 없지만, 적어도 "뭐 마실래?"라고 물어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단순한 걸 까먹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남자가 내 남편이다.
남편은 야박한 인간이 아니다. 친정 모임이 끝나고 친정 아빠에게 드리라며 대리비를 챙겨 왔을 때 나는 그 배려심에 감동했다. 하지만 세심함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연애 시절에는 이 남자가 어떻게 지금까지 연애를 했을까 하는 의심이 든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안쪽 자리는 여자친구에게 양보해주세요.(출처=pixabay)
커플이 되고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우리는 강남역 근처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한껏 꾸미고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남편이 저 멀리서 손을 들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기분이 상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남편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지금 여기 커플들을 봐."
레스토랑 안 모든 커플이 한결같았다. 편하고 푹신한 안쪽 소파에는 여자가, 불편하고 딱딱한 바깥 의자에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와 남편만 빼고. 남편은 "네가 쉽게 찾지 못할까 봐 입구를 향해 앉아 있었다"라고 해명했다. 임기응변적 답변치고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럼 왜 내가 왔을 때 자리를 바꿔주지 않았느냐"라고 따졌다. 레스토랑 안에서 남자 친구에게 배려받지 못한 유일한 여자로 보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미술관에서 자기 팸플릿만 챙겨 온 남편을 가만둘 수 있었을까. 남편은 그날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남편은 항상 두 장의 팸플릿을 챙기고, 한 장만 챙길 때에는 "팸플릿이 다 떨어졌더라"라며 내게 설명을한다.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사소한 배려에 취약하다는 걸 진즉 알고 계셨다. 결혼 초 시아버지 칠순 기념으로 충남 대천에 놀러 갔을 때다. 횟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내가 시부모님 신발을 신기 편하시게 내려놓았다. 시어머니는 뜻밖의 작은 배려에 감동하신 눈치셨다. 그러면서 "OO가 이런 거는 잘 못하니 이해해줘"라고 말씀하셨다. 그땐 미처 몰랐다. 내 남편은이해가 아니라 가르침이 필요한 남자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