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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30. 2020

2008년 금융 위기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69

뉴센츄리 파이낸셜 파산 이후 잠시 소강상태가 진행됐다.


당시 연준 이사회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는 더는 금융권의 확산이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극적인 대응을 진행하지 않았다.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서브프라임 모기기 손실은 최대 1천억 달러로 추산되며, 미국 경제에 주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2008년 9월 부시 대통령과 버냉키 연준 의장   <출처 : 위키피디아>  


금융 위기의 시작


태풍이 오기 전, 잠시 숨을 돌리는 시기였다. 가장 먼저 시작을 알린 것은 베어스턴스(The Bear Stearns Companies, Inc.)였다.


투자은행 중 가장 큰 회사가 5개(골드만삭스, 리먼 브러더스,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베어스턴스)였다. 그 중에 하나였다.


베어스턴스 이전 사무실   <출처 : 위키피디아>


2008년 3월 유동성 부족으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지급불능에 빠졌다. JP모건체이스(JP Morgan Chase)에 자금 지원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연준과 재무부(당시 장관은 헨리 폴슨(Henry Paulson, 1946~ )가 직접 나섰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290억 달러의 손실 보전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JP모건체이스에 매각됐다.


리먼 브러더스와 메릴린치의 파산


이어 6월 리먼 브러더스(Lehman Brothers)의 2분기 실적이 발표됐다. 무려 28억 달러의 적자가 발생 했다.


이후 리먼은  자사를 인수할 대상처를 여러 군데 타진했다. 우리나라의 산업은행도 이 후보에 들었다.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 체결 직전까지 갔으나 매매 가격의 입창 차이로 최종 불발됐다.


리먼 브라더스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발표 다음 날 리먼의 주가는 45% 폭락했다. 일주일 뒤 파산 신청(2008년 9월)을 했다. 당시 부채 규모는 약 6천억 달러($613 billion)였다.


파산 발표 후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장면이 TV 화면에서 생중계됐다. 이때 비로소 많은 사람이 금융위기의 두려움에 충격을 받았다.


리먼 브라더스 사테   <출처 : 게티이미지>


상장 폐지가 진행됐다. 회사는 쪼개져 일본의 노무라 증권(Nomura Securities Co. Ltd)과 영국의 바클리즈(Barclays PLC)에 분할 인수되면서 해체됐다.


당시 연준(Fed)은 리먼 브러더스에 대한 대출 보증을 거부했다. 이것이 파산의 한가지 요인으로 남았다.

연준이 리먼을 거부한 이유는 미국 국민의 정서 고려와 구제에 관한 법적인 권한이 없다는 이유였다.


뉴욕의 리먼 브라더스   <출처 : 위키피디아>


이날 메릴린치(Merrill Lynch)도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BoA)에 인수됐다.


메릴 린치는 자본 규모가 350억 달러에 40개 국가의 운용 자산만 1조 달러가 넘었다. 대형 투자은행이었다. 하지만 손실 규모를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500억 달러(주당 29달러)에 매각이 됐다.


메릴린치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이로써 미국의 5대 투자 금융 회사 중 3개가 사라졌다. 미국 금융사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AIG와 워싱턴 뮤추얼 은행 매각


이 다음날(9월 16일) 대형 사건이 또 발생했다. 연방 정부가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American International Group, Inc. 일명 AIG)’ 지분 79%(850억 달러)를 인수했다. 사실상 국유화를 선언했다.

 

금융시장의 신용 경색은 더는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심리적 공황과 불안감으로 완전히 거래 자체가 마비됐다.


뉴욕의 AIG   <출처 : 위키피디아>


이튿날 연준은 시장을 구제하려는 방안을 속속 발표했다. 9월 20일 재무부는 부실자산 구입을 위한 공적자금 요청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9월 26일 미국 최대 저축은행인 워싱턴 뮤추얼 은행(Washington Mutual, Inc)이 파산했다. 몇 주 사이에 발생된 167억 달러 규모의 고객 대량 예금 인출을 감당하지 못했다.


19억 달러에 JP모건체이스 은행이 인수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대 은행의 파산 사건으로 기록됐다. 대출 금액만 3,000억이 넘었고 전국 각 지점이 2,200개의 대형은행이었다.


JP모건체이스  <출처 : 위키피디아>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사태는 9월 29일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금융권의 부실자산을 구제하기 위한 긴급 법안인 ‘2008 긴급경제안정법(Emergency Economic Stabilization Act of 2008)’이 하원에서 부결됐다. 이유는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가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이 날 다우 지수의 기록적인 폭락이 이어졌다. 금융권과 정치권의 곡소리에 결국 10월 3일 법안이 가까스로 통과됐다.


연방정부는 7,000억 달러를 금융시장에 즉각 투입하여 부실화된 자산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연방정부가 금융시장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되었다.


실물 경제의 위기와 양적 완화


금융 위기는 실물 경제로 옮겨졌다.


2008년 11월 미국 자동차 회사 빅3(Big three) 인 포드, GM, 크라이슬러 회장이 청문회장에 들어섰다. 이유는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위해서 였다.


이튿날 신청한 250억 달러의 구제 자금 지원이 불발됐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우 지수가 바로 답변을 했다. 무시무시한 폭락을 보여줬다.



2008년 금융위기 스프레드 지수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미국인들의 생각은 ‘금융회사도 무너지고, 보험사도 망하고, 제조업까지 손을 내미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강하게 들었다. 연일 부정적인 뉴스만 발표되는 상황에서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인 구원투수로 연준이 나섰다.


2008년 11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QE)’를 발표했다.


5,000억 달러 규모의 ‘주택담보대출유동화증권(MBS)’ 매입과 ‘TALF(Term Asset-Backed Securities Loan Facility)’라는 새로운 대출제도에 2,000억 달러를 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양적 완화’라는 단어가 경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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