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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사랑 vs 현실적 사랑

by 정지영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쉽다."(It is easier to love humanity as a whole than to love one's neighbor.)(에릭 호퍼, <변화의 시련> 중에서)


인류애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전쟁, 기아, 환경 문제에 공감하고 기부나 서명을 통해 행동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까운 가족, 친구, 이웃에게는 무심할 때가 많습니다. 왜 우리는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한 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쉽다고 느낄까요?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변화의 시련(The Ordeal of Change)』에서 이 문제를 분석합니다. 그는 대중운동과 인간 심리를 탐구하며 사회적 약자들과 마주한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본 사회적 약자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조용하고 순종적인 희생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칠고 무례했으며, 종종 증오와 악의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호퍼는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권력은 소수를 부패시키지만, 약함은 다수를 부패시킨다. 증오, 악의, 무례함, 편협함, 그리고 의심은 약함이 맺은 열매들이다. 약자의 원한은 그들이 당한 부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부적절하고 무기력한 존재라고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의 부를 나눈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관대함을 억압으로 느낀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대중운동은 인류애를 기반으로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기대와 다를 수 있습니다. 거친 태도는 자존감 결핍에서 비롯되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사랑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기부나 봉사활동을 통해 인류애를 실천한다고 믿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쉬운 방법입니다. 국제구호단체에 후원하거나 봉사에 참여하는 것은 적은 노력으로 만족감을 주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자존감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호퍼는 인류애가 단순한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상대의 적대감을 넘어서려는 깊은 이해와 인내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회적 약자는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의 무례함과 적대감은 자존감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인류애는 막연한 동정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돕는 실천적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추상적인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사랑은 인내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얼굴" 개념을 통해, 우리가 실존적으로 마주하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도덕적 책임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개념적 사랑은 타인을 이상화하며, 그의 개별성과 경험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반면, 실존적 만남은 타자의 고통과 요구에 직접 응답하는 윤리적 책임을 수반합니다. 이는 나의 관점이 아닌 타자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사랑입니다.


호퍼의 통찰은 인간 심리를 꿰뚫습니다. 진정한 인류애는 개념적 사랑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불편할 수도 있는 타인의 거칠고 무례하며 이기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받은 자존감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인류애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인류애의 실천은 결국 타인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류애는 고귀한 개념이지만,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작은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진심 어린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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