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의 글쓰기
북경이 행정의 도시로 뭔가 클래식한 느낌이 있다면 상해는 글로벌한 경제 도시로 화려한 이미지가 있다. 상해 시티그룹은 푸둥 지역 동방명주 바로 옆에 위치했는데 주변 환경은 물론 건물 자체도 존재감이 남달랐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이제 막 인턴이 된 내가 2달간 머무르게 된 숙소는 상해 한 대학의 외국인 학생을 위한 기숙사 겸 호텔이었다. 나에겐 룸메이트가 있었고, 숙소의 난방은 열악했다. 용감하게 한국을 떠나왔지만 온실 속 화초에서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처럼 비바람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직속 상사는 앳된 얼굴의 중국인 남자였고, 첫날 오티 때 내가 기업 대출 관련 마케팅 부서에 배정됐음을 알려주었다. 당시 한국은 물론 수많은 해외 기업들이 중국에 공장을 짓고 있었고 자연스레 대출 관련 부서들 역시 분주하게 돌아가던 때다.
함께 업무를 시작한 내 또래 인턴들은 10여 명 가량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유일한 한국인으로 모두 중국인이었다. 시티그룹은 글로벌 그룹이었으나 내가 직접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중국인. 그때부터 본격 서바이벌 중국어가 시작됐다. 중국어가 아니면 영어로 소통하면 되겠지,라는 매우 철없는 생각을 했던 나로서는 매일매일이 진땀 나는 순간들이었다. 제일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는 ‘不好意思’ 였으니 말 다 했다.
인턴으로서 내게 주어진 일은 대략 이러했다. 대출 계약이 성사되면 고객사 정보를 시스템에 입력하고, 내부 정산을 타기 위해 여러 부서를 돌며 결재를 받았다. 어떻게 언어를 극복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매일매일 정신없이 바빴고 그 와중에 늘 신경을 곧추세우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으니 말이다.
특이했던 건 직장 동료 간 사적인 모임이 전혀 없었다. 퇴근 후 저녁 식사나 술 한잔 같은 친목 모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또래 인턴 친구가 조심스럽게 들려준 이야기로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며 직장에서 사적인 관계를 만들거나 친구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그 친구의 이야기로 전부를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흥미로운 해석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겨울이라는 추운 계절에 끈끈한 동료애마저 느낄 수 없던 터라 외로운 날들이 많았다. 본래 성격이 외향적이고 친구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이런 사회생활이라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팍팍한 거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한국인 주재원분들이 잘 챙겨주시긴 했지만 그분들은 직급도, 나이도 나보다 한참 위인 분들이셔서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인생의 선배로서 나의 무근본 질문에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함께 고민해 주시고, 대답해 주셨던 고마운 분들이다.
‘외국에서 일한 다는 건 어떤가요? 저는 정말 본격적으로 이렇게 일을 해보고 싶거든요!’
답변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차갑기 그지없었는데,
‘아니 지윤씨는 왜 여기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해요? 한국에 돌아가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잖아요. 일단 여기서 일을 하려고 하면 지금이야 상해에 있지만 발령이 나게 되면 열악한 환경의 지방으로 날 가능성이 높아요. 대게 그런 곳에 공장이 많으니까.(한국 기업 대상 대출 업무는 그런 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니까) 외국에서 일해보고 싶다면 오히려 한국 기업 가운데 외국에 진출해 있는 그런 곳을 지원해 봐요’
한국인으로 취업을 한다 해도 본인들처럼 주재원 발령이 아닌 현지 채용으로 될 텐데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돈을 모을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럼 부장님들은 제 나이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나는 유럽에 가서 대학원, 석사를 할 거 같아요. 학창 시절을 더 누려보고 싶기도 하고 선진 문화, 사회를 경험하고 싶거든’
아직 대학 졸업까지 1학년이 더 남은 나는 어떻게든 빨리 사회에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학생 기간을 더 연장하고 싶을 거라는 답은 어쩐지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두 달간 인턴 생활은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라는 김기림 ‘바다와 나비’를 떠올리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턴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떠나려고 하니 함께 일했던 인턴들이 상해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오던 어느 주말 상해 현지인이기도 한 그들과 로컬 구석구석을 다니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에는 한국 돈으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약 14만 원쯤 되는 급여를 받고(두 달치라 28만 원이었던가;;)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
‘사회생활에 있어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 간의 관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지윤 씨는 사람들하고 잘 지냈나 봅니다. 지윤 씨에 대한 평가가 좋아요. 누구나 한 명쯤 나를 싫어하거나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만으로도 인턴 생활을 잘 해낸 거 같군요!’
돌이켜보면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많은 요소들이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졌잘싸’. 그때의 나에게 졌지만 잘 싸웠다고 대견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에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진 것 같은데 그래도 잘 싸웠다고, 잘 견뎌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 신분으로 소중한 경험을 했으니 이보다 값진 경험이 있을까?
8cm 하이힐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신다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다 크게 접질려 아직까지 영광의 상처로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대학 3학년 겨울 방학은 상해에서의 인턴 생활과 함께 막을 내렸다.
대학 4학년 3월.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었으니, 이번엔 CNN인턴이다! 지난겨울 마주한 차가운 ‘현실’이 뭐가 대수라고. 울타리 밖 세상이 너무너무 궁금했던 그 시절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걸…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