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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영 Sep 14. 2022

추억이 없었다

아빠의 통장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 동생과 나는 은행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울어서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 나는 은행 입구까지만 동행했고 업무처리는 엄마와 동생이 진행했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와 동생이 나오지 않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창 밖을 내다보는데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겨울동안 죽어 있었던 나무에는 새로운 잎들을 제법 무성해졌고 길가에 꽃들도 만개한 상태였다. 분주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가롭게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보였다. 바로 앞에 학교도 보였지만 운동장은 조용했다. 휴교이거나 온라인 수업 중이었을 것이다. 

멍하니 거리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다. 요즈음에는 아빠라는 말만 떠올려도 눈물부터 흐른다. 아빠가 살아 계셨을 때에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입관식과 발인식에서 아빠를 목놓아 불렀다. 

창 밖을 바라보면서 아빠를 떠올리는데 추억이 없었다.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 갔던 추억, 자전거를 가르쳐 주었던 추억, 가족들이 함께 여행을 갔던 추억.. 당연할 수 있는 추억이 나는 없었다. 술을 즐겼던 젊은 시절의 아빠는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 적었다. 어린 시절 아빠와의 유대감 형성이 부족해서인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아빠와의 대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추억도 없었고 대화도 없었던 아빠와의 관계였기 때문에 아빠가 생각나는 장면이 별로 없었다. 단지 아빠를 생각할 때에는 내가 못해준 것들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 아빠의 웃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빠는 평소에도 짜증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로 짜증의 대상은 엄마와 동생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경우 주말에만 집에 오기 때문에 주로 짜증의 대상은 한사람 엄마에게로 향했다. 아빠가 나에게 짜증이 덜했던 이유는 내가 아빠와 비슷한 성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처럼 매일 짜증내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 참다가 한번 폭발하면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이미 몇 차례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나에게 짜증을 내지 않았다고 내가 생각하는 아빠의 기억이 온화한 사람으로 미화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아빠가 그리운 것을 보면 머리보다 마음이 영원한 이별을 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결국 화창한 어느 봄날 은행 입구 창가 앞에서 나는 또다시 아빠와 이별을 했다. ‘아빠, 그 곳에서는 화 좀 줄이고 같이 있는 사람들한테 짜증 내지마, 안 그러면 거기서도 외로울꺼야.’ 여기까지 말하는데도 내 마음은 이미 눈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별을 이어 나갔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너무 많이 울거나 그리워하면 이승을 떠날 수 없다고 하던데, 맞어? 이제 아빠를 떠나보내야겠지? 내가 아빠 걱정하지 않게 거기서는 마음고생 하지 말고 아프지 말고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행복하게 살어, 나중에 만나자.’이별을 하고 나서야 은행 업무를 마친 엄마와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황급히 눈물을 감추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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