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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Oct 29. 2020

10월 하순, 이른 아침 풍경



아침 6시 45분

집을 나선다. 남한산성 법원 역까지는 두 정거장,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버스로 이동했던 거리다. 하지만 시차 출근제를 시행하면서 버스로 이동하는 두 정거장은, 걷는 즐거움으로 대체했다. 덕분에 하루 평균 3,000보 이상 걷는 양도 늘었다.


10월 하순, 가을이 완연해지면서 아침 공기도 제법 쌀쌀해졌다. 천천히 걸어도 전철역까지 15분이면 족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평소 느끼지 못한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느낄 수 있어서 그런지 걷기로 한 결정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집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접하는 광경은 1톤짜리 족 발 트럭이다. 차 위에서 족 발을 다듬는 아주머니가 첫 사람인 셈이다. 우리 집과는 불과 20M 정도 떨어진 주택에 사는데, 몇 시부터 족 발을 삶는지, 집을 나설 때쯤이면 구수한 족 발 냄새가 코끝을 괴롭힌다. 아침을 건너뛰고 맡는 냄새는 위장 세포를 깨우기에 충분하다. 오히려 식욕을 자극해서 괴롭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먹을 수 없으니 잊을 수밖에.


집 앞 4M 도로를 벗어나면, 왕복 4차선 대로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만난다. 가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직장인들의 출근길은 늘 바쁘다. 반면에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산행 객들의 발걸음엔 여유가 묻어난다. 간혹 젊은 친구들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나이 든 어른들이다. 가방 하나 둘러메고 모자를 눌러쓴 어른들의 손엔 지팡이 하나쯤은 기본이다. 가방을 뒤져보진 않았지만 막걸리 한 병쯤 들었을지도 모른다. 장인어른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청소차 아저씨도 이른 아침을 여는 주인공들이다. 대로변엔 크고 작은 먹거리 점포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치울 것도 많은데, 밤사이 떨어진 가을 낙엽은 수고를 더하는 덤이다. 내색하지 않지만 그들의 수고가 깨끗한 아침을 여는 시발점인 건 분명하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는 속상하다. 다른 건 몰라도 조금만 신경 쓰면 담배꽁초를 색출하는 수고 정도는 덜어 드릴 수 있는데 말이다.   


이번엔 떡집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이 보인다.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만 오늘은 급한 주문을 받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7시도 안된 시간에 문을 열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족 발 냄새도 힘든데 오늘 아침은 떡집까지 위장 전쟁을 부채질하는 아침이다.


전철역에 도착했다. 10시 출근제에 해당하는 지난주에 비하면 8시 출근제가 시행되는 주간 아침은 여기저기 빈 좌석이 즐비하다.

후 웨이홍이 지은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를 꺼냈다. 여덟 정거장만 가면 내려야 하지만 마음의 양식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족발과 떡은 못 먹었어도)


이탈리아 유명 작곡가 베르디에 관한 이야기 부분을 읽을 차례다. 어떤 젊은 음악 애호가와 베르디가 이야기를 나눈다. 베르디가 다른 음악가의 훌륭한 작품만 이야기할 뿐, 자신에 관한 것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젊은 음악 애호가는 의아했는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당신의 명성이 높은데 이렇게까지 겸손하실 필요가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한 베르디의 답변은 이랬다


"내가 젊은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나는 늘 '나'를 입에 달고 살았지요.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늘 '나와 모차르트'를 말했고, 마흔 살이 되자 '모차르트와 나'를 말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작은 소리로 '모차르트'라고 말할 뿐이오"


여덟 정거장을 오면서 이 문장 하나만 곱씹었다. 그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서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찔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따지고 보면 '나'에 대한 글 아닌가? 육십이 코 앞인데 '나'를 드러내려 애쓰는 걸 보면 나이를 먹어도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하니 말이다.


7시 30분,

사무실에 도착했다.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내리고, usb를 꼽고, 파일을 열고....

또 시작이다. 어제 못다 한 그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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