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종로 3가 근처를 지날 즈음 어떤 할아버지가 다가 오시더니 소리를 치셨다. 나는 그 날 광우병 파동 집회에 참여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고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무척 오랜만에 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이라는 표현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때 몇 번 듣긴 했었는데 그땐 그냥 말 자체가 웃겼던 것 같다. 8살인 나와 6살인 동생이 웃기는 표현이라며 서로에게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라며 놀렸던 것 같다. 그런데 다 커서 그 소리를 다시 들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머리에 피가 다 말라야 어른이라는 소린가. 근데 머리에 피가 다 마르면 죽는 거 아닌가?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다는 소리가 생긴거지?'
그렇게 생각하곤 또 한참 있고 있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소리를 몇 해가 지나 지금 내 앞에 계신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또 말씀하고 계셨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 내 머리였고 진짜 내 피였다.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지금 내 머리는 왼쪽 뒷편에 혈관이 터져있었다. 차라리 피부 바깥으로 피가 터져 나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머릿속에서만 혈관이 터져 고인 피가 뇌를 서서히 눌렀고 그래서 마비까지 이어졌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상황은 정말이지 머리에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의사 선생님은 우선 머릿속 피가 마르고 혈관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야 결과를 파악할 수 있어서 우선은 지켜봐야 한다고 하셨다.
살다 보면 결과만큼 중요한데 잊고 있는 것, 원인
의사 선생님은 그래서 머릿속에 피가 마르는 것은 둘째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바로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젊은 처자가 왜 뇌출혈에 걸렸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환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우선은 뇌출혈 판정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치료를 하고 완치 판정을 받는 결과가 더 중요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을지에 온통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수록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이유를 강조하셨다. 내 신경이 온통 쏟아져있는 그 완치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원인, 왜 뇌출혈이 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원인... 뇌출혈이라는 병부터 나는 잘 몰랐기 때문에 정보를 찾아보고 싶었지만 첫 페이지부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큰 병이 걸리면 당사자는 정작 그 병을 제대로 검색조차 할 수 없어지게 된다.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그 병과 전혀 상관없던, 건강한 상태일 때는 지극히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만 보이던 정보들이 그 병에 걸리고 다시 보면 모두 곧 죽을 것 마냥 나쁘고 위독하고 심각한 내용들 뿐이다.인터넷으로 찾은 정보만 보면 나는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