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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22. 2022

행운과 불행 사이

스파이더걸

아침이 밝았다. 케이프타운에서의 두번째 달 첫 아침을 새로운 방에서 맞는.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열어보니 창문  풍경이 어제와 달랐다. 이사를 해서였다. 푸르른 9의 케이프타운은 봄날이 찾아온다. 하늘은 청명하고 테이블 마운틴 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라이온스 헤드는 더욱 뚜렷한 모습이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어젯밤 혼란스러운 장면들은 연극의  막이 내린  마냥 기억이  나지 . 그래도 조심스러운 마음에 살짝 방문을 열었.


진짜로  남자 친구들까지 여기서 설마 사는건 아니겠지, 정말.. 가끔씩 오는 것이 맞는 걸까.’


두리번거리며 꼿발로 살금살금 다른 방의 동태를 살피는데 아무도 . 어제  커다란 개도 없다. 내가 꿈을  걸까.


조심히 부엌으로 방향을 살짝 틀자마자, 세상에... ~ 나의 밥솥님.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 눈부신 밥솥이 주방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젯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들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반짝이는 밥솥을 보니 기분이 날아갈  같다.


당장 마트로 향했다. 우와.. 세상엔 정말 다양한 쌀이 있나 보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쫄깃쫄깃 찰진 쌀과 비슷한 모양은   개뿐이지만,   태어나서 처음 본다. 옛날 우리나라 엽전의 미니어처같이 생긴 쌀도 있고 검정쌀은 물론 황금색, 보라색 쌀도 . 생각만 해도 고소하고 따뜻한 . 지금 당장이라도 밥솥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저녁으로 보류했다.


우선은 어젯밤, 조용하던 그린포인트 골목에 ‘ 지금 이사 가요라고  동네에 광고하듯,  커다란 이민가방에 캐리어 가방의 우렁찬 바퀴소리를 나와 함께 만들어준 흑인 아주머니께 먼저 가고 싶었다. 혼자였다면예전 홈스테이 할머니의 싸늘한 반응에 나는 그냥 얼어버려서 혼자서는 도저히 이사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없이 이사하던 그때, 그래도 흑인 아주머니께서 소리도  내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나에게 괜찮다고, 할머니  못됐다고, 옆에서 계속 나를 다독여주셨던 것이 어제의 이사 스토리였다.


어제의 나쁜 기억들은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쌀을 집에 내려두고 헬스장으로 갔다. 기분 좋게 운동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비누를 문지르는데  사이에 배에 뭐가 물린 건가 배에 뭔가가 나 있었다.


봄은 건너뛰고 벌써 여름이 오려나, 모기에 물렸나 보다.’


운동을 마친 뒤, 꽃집에 들러 제일 노란   다발을 샀다. 할아버지네 집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세상의 모든 노란색 빛이 하루에  번씩 들리는  . 아마 노란 꽃을 들고 가면 햇살들과 금방 친구가   같았다.


그렇게 노란꽃다발과 함께 아주머니를 찾았다. 나른한 한낮의 오후.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눈다. 얼마만의 여유인지... 발코니  짧게 펼쳐진 지붕을 그늘 삼아 나도 모르게 벤치에 앉아 잠이 들었다. 그런 나를 깨우지 않고 아주머니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제 함께 짐을 들어준 아주머니의 친구 분까지 마실을 오셨다. 차를 마시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수다를 떨던 여자 셋. 나는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앉은 . 눈을 비볐다.


‘이게 뭐지. 그날인 건가. 그래서 피곤했던 건가.’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다시 눈을 비볐다.


‘이게 뭐지. 정말 이게 뭘까.’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게 뭘까. 태어나서 처음  붉고 노르슴한 색깔의 공기방울들이 왼쪽 다리를 덮고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니 왼쪽 다리를 덮은 물집들은 새빨갛고 노란 피고름을 하나 가득 담고 있는 듯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다른 병은 모르는데, 아프리카 하면 에이즈가 떠올라서 심장이 멈추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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