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많은 사람
멍청하게 '1-6'이라 적힌 초록색 네모판만 바라봤다. 삼 년 전에도, 우리는 똑같은 숫자가 써진 교실에서 함께 했다. 일 학년 육반. 두 개의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교실의 주인들과 그 안의 박민준은 훌쩍 커버려 내가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는 키가 돼버렸다. 손 끝에 맺힌 서늘한 물방울이 매끈한 복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김윤서가 내 등을 쿡 찔렀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민준이 내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가슴팍이 보였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들어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순간 양 볼이 화끈거리다 못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끓는다는 게 이런 걸까? 나는 아직도 민준이 내 손에서 바나나우유를 가져가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오, 내 거?" 하는 낮은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리자 귓바퀴부터 어깨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바나나우유를 든 손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으로 귀를 막으며 몸을 움츠렸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행동에 김윤서는 웃음을 터뜨렸고, 박민준은 놀라 허둥지둥했다.
"그래서 걔랑 어떻게 됐다고 했었지?"
"비밀."
우진은 내가 첫사랑 이야기를 끝까지 해주지 않는 것에 늘 불만을 가졌다. 우리 사이가 꽤나 복잡하기에 나는 그에게 내 사랑 이야기의 결말을 들려주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너는 비밀이 너무 많아."
"궁금한 게 많아야 좋잖아. 나는 네가 내 하루를, 내 일주일을, 내 일생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아, 정현은 내가 없을 땐 어떤 사랑을 했을까.' 상상이 더 자극적이니까. 너는 내 실제보다 더 자극적인 내 사랑들을 질투하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다 이야기해 주잖아."
"그게 문제라는 거야."
과거를 아는 것은 걸림돌이 된다. 그에게도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