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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무 Mar 19. 2022

[Lv.15]회사 계단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몇 차례 이야기했었지만 내 본캐(*원래의 캐릭터)는 IT 보안 엔지니어다. 우리 회사는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데, 기업을 대상으로 판매된 백신에 대해 기술지원을 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주로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한다. 컴퓨터가 악성 코드에 감염되었다거나, 해킹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업무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만 우리 팀으로 연락을 한다.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다. 문제가 발생해서 기분이 나쁜 사람과 기분이 매우 나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매일 같은 루틴으로 업무를 준비한다. 업무 전 의식처럼 책상 위 모니터 두 개의 각도를 다시 한번 맞추고, 한 뼘 조금 넘는 크기의 텀블러에는 둥굴레차 티백을 넣은 후 물을 가득 채워 둔다. 하루 종일 전화 붙들고 입씨름을 하다 보니 충분한 물은 필수다. 9시 땡 하면 전화가 울리는데, 내 전화가 일등으로 울리면 괜히 하루 종일 재수가 없을 느낌이 든다. 주섬주섬 헤드셋을 쓰고 문의 전화를 받으며 업무를 시작한다.


 회사를 5년 정도 다닌 지금에서야 경력이 쌓이면서 일에 익숙해졌지만, 입사 초반에는 문의 전화를 하나 받을 때마다 얼레벌레 당황하기 일쑤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었고, 신입일 때의 나는 업무 처리 능력도 낮으니 화만 더 돋울 뿐이었다. 프로그램에 문제가 발생하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사용자들이 회사 일을 할 수 없어진다. 직장인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인 퇴근시간이 달린 일이라 짜증이 날만도 하다. 안 그래도 빨리빨리의 민족이라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독촉했다. 당연히 신입의 속도를 인자하게 기다려줄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화를 받으니 다짜고짜 암호를 풀어달라고 했다.


 "제 컴퓨터가 랜섬웨어에 걸려서 파일들이 다 암호화되었거든요. 이거 어떻게 해요? 일 해야 하니까 잠긴 것 좀 풀어주세요."


 컴퓨터 악성 코드 중에서는 악명 높은 랜섬웨어라는 유형이 있다. 요즘은 뉴스에도 많이 나와서 한 번쯤 들어봤을 바이러스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해커가 심어놓은 랜섬웨어 악성코드가 컴퓨터의 파일, 사진들을 암호를 걸어 잠근다. 컴퓨터를 켜는 것조차 못하게 암호를 거는 경우도 있다. 해커가 요구하는 거액의 돈을 주고 암호를 풀거나 자료들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는 심각한 피해라서 기업들은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잘 모르는 일반 사용자의 경우 이렇게 무작정 암호를 우리에게 풀어달라고 한다.


 "죄송하지만, 랜섬웨어 바이러스는 해커가 파일을 암호화했기 때문에 저희가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복구는 어렵고 어떤 경로로 침입했는지 컴퓨터 점검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저희 회사에서 돈 내고 백신 쓰잖아요. 악성 코드 걸릴 거면 왜 써요. 안 그래도 백신 때문에 컴퓨터 느려지는 거 같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는데 바이러스 치료도 못하나요?"


 "백신을 사용하시더라도 모든 악성코드를 막아줄 수는 없습니다. 신종이나 변종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죠. 예방 주사를 맞더라도 감기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랜섬웨어는 특히 해커가 암호화한 파일이라 저희는 복구가 불가합니다."


 "그러니까 악성코드 잘 못 잡는 프로그램 판다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는 왜 이런 걸 써가지고 짜증 나게."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고 이어서 설명하려는데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설명한 대로 컴퓨터 백신도 사람이 맞는 백신과 동일한 원리다. 백신 맞았다고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고 만수무강하며 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코로나 바이러스도 백신을 맞는다고 절대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종인 오미크론이 또 한 번 돌파 감염을 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백신을 구매했으니 모든 악성코드를 막아달라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정도 일이야 능숙하게 대처하고 기분만 잠깐 나쁜 정도였을 거다. 하지만 신입사원한테는 치명타였다. 그 짜증 내는 말투와 목소리에 도저히 기분이 회복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이미지는 죽어도 싫었다. 점심시간에 속이 좋지 않아 굶겠다고 말하고 회사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취업한 건가?', '내가 대처를 잘 못해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조금 가다가 친구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야? 무슨 일 있었어?"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받자마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무슨 일 있는지를 물었다. 말을 시작하면 눈물 때문에 말을 이어가지 못할 거 같아서 '여보세요.'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목소리를 끄집어내서 말을 이어갔다.


 "회사에서 고객사랑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심각한 건 아니고 좀 열받더라고. 지금은 괜찮아지긴 했는데 점심시간이라 잠깐 걸어봤어."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전혀 안 괜찮아 보이긴 했나 보다. 친구는 가라앉은 내 기분을 바로 알아챘다.


 "왜 다 괜찮대!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다 참고 괜찮다고 하면 병나. 무례한 상황에 대해서 실컷 화내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러고 털어내는 게 낫지. 괜찮지 않아도 돼."


 나에게는 괜찮다는 말보다 몇 배의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정말 괜찮지 않았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꺼이꺼이 울었던 거 같다. 나도 모르게 나쁜 감정들이 쌓여왔었나 보다. 내가 입사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펑펑 울었던 날이었다. 그것도 차가운 회사 계단에 쪼그려 앉아서 말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눈물 날 일들은 수두룩하게 많았다. 여자 엔지니어에게는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둥, 쓰레기 같은 거를 판다는 둥 무례한 상황들이 끊이질 않았다. 회사뿐만이 아니었다. 부캐였던 '블로거 나', '사장님 나'도 사람에게 참 많이 상처받고 위로도 받았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부캐들이 겪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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