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모린 Jul 02. 2018

일그러진 순간

관계에 지쳤던 어느 날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 하루를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불규칙하게, 그러나  자주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솟아났다. 생각이 무게를 가질수록 망설이는 하루가 쌓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 그 사람에게 보내고 싶은 말을 지우고 다시 썼다. 친구들에게 왜 용기를 내지 못하냐고 타박하던 내 모습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주 연락하면 귀찮아할 거야.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변명이 행동을 멈춰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늘어졌다.



바쁜 나머지 연락하는 걸 잊었을 거야.
핸드폰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정이 생긴 게 아닐까.



  기다림 속에서 나는 가정쌓아 올렸다. 연락이 닿지 않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나는 현실 대신 가정을 영화로 만들었다. 의미가 같은 장면을 무의미하게 찍으며 하루를 견뎌냈다. 그러나 아무리 견뎌도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화면.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정답은 단순했다.
그는 그저 나를 잊은 것이었다.


  진실을 알고 난 뒤 내게 남겨진 건 선택이었다. 이대로 내 마음을 부정하면서 그와의 끊어질 관계에 매달릴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 첫사랑. 늘어졌던 짝사랑 앞에서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다. 커지는 만큼 부정당할 내 아득한 기억들을 품에 안고서 드디어 나는 연락을 했다. 내가 담고 싶은 만큼의 마음을 가득 담아 써 내려간 이야기 속에는 일말의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친 나와 더는 중요하지 않은 그의 감정이 있었다. 거절하기 위한 고백은 그렇게 예정된 결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당연하게 가을이 왔다.



  기억이 일그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추한 상상을 했던 나를 위해 그와의 기억을 서둘러 재편집했다. 편집의 과정 속에서 나는 기억과 다른 장면들을 마주했다. 나를 온전히 바라보지 않던 눈동자.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책상 위를 탁탁 두드리던 그의 검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키는 '나'의 모습. 그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장면이 다른 영화가 상영을 시작했다.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왜곡하는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그를 위해 스스로를 맞추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모습을 위해 맞지 않는 색을 덧칠했다. 욕심의 크기만큼 새로운 색을 덧발랐다. 색이 쌓여갈수록 얼굴은 검게 물들어버렸다. 물감이 굳자 더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추하게, 내가 망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사라진 내가 있었다.


  그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이미지'를 정하곤 했다. 그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주는 사람. 나는 그가 가장 원하는 대답을 떠올렸다. 그 한 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열어주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름길은 그와 나 사이의 간극을 빠르게 좁혀주었다. 기쁨이 부풀었다. 그 순간에 나는 같은 환상에 취해 있었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환상.


  관계가 쌓여갈수록 지름길은 '나'를 묶는 족쇄가 되었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 나였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타이밍에 맞춰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덕분에 그들의 이야기에는 틈이 없었다. 나에게 쏟아낼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나는 그의 이야기 속 정답을 찾기 위해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원하는 '나'를 벗어나도 내가 온전히 그의 옆에 존재할 수 있을까. 불안은 곧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로 이어졌다. 비틀어진 관계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추락했다.


  나는 그에게 나를 맞추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짜 자신을 지웠고 그 순간이 나를 추락시켰다. 추락할수록 나는 추해지는 자신을 자책했다.


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괜찮다'는 말의 독약을 들이켰던 것이다.


  그를 떠나보내며 나는 관계 속에서 '그'를 중심에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심에 맞춰 나는 스스로를 바꾸기 바빴다. 그가 나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도록. 채찍질이 길어질수록 두려움은 몸집을 키워갔다.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그와의 관계는 일그러졌다.


나는 그에게 필요할 때 찾는 '구멍'이 되어버렸다.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피신처.
필요하지 않을 때 언제든 덮어버릴 수 있는 관계였다.


  그렇게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과 마주했다. 환상이 만든 착각 속에서 더 파묻혔던 지난날의 기억들. 나는 기억들을 담아 구멍을 채워나갔다. 일그러진 관계에 더는 나를 묻어두지 못하도록. 구멍이 완전히 차오르고 나니 흙에 범벅이 된 내가 보였다. 추했다. 그러나 웃을 수 있었다.




이전 01화 29살, 어느 날의 결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