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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Nov 13. 2018

동물농장_우리 안에 갇힌 우리

조지 오웰 - 동물농장

우리 안에서


  그들은 우리 안에 있었다. 우리 안에서 그들은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한 삶. 그들에게 자유는 없었다. 그저 인간에 눈에 들어온 동물이 다른 동물들보다 조금 더 나은 ‘보상’을 받을 분이었다.



  보상은 그들의 눈을 쉽게 가릴 수 있었다. 인간의 선택을 받은 저 ‘동물’처럼 행동한다면 어느 날 자신 역시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문제는 인간에게 사랑을 받았던 동물조차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죽음.
가치를 잃은 ‘동물’은
도축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둔 돼지 ‘메이저’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동물들은 언제까지 ‘인간’에 의해 삶이 결정되어야 하는가. 메이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안의 동물들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그저 도축되기 전까지 자신의 삶을 ‘인간’의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이용당할 뿐이었다.



  메이저는 우리 안 동물들이 불합리한 ‘인간의 우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동물들이 자유를 찾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전제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을 ‘우리’ 밖으로 몰아내는 것.


  메이저는 인간을 몰아내기 위해서 모든 동물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전했다. 모든 동물이 완벽한 ‘단결’과 ‘투쟁’을 완성하는 순간 그들을 ‘우리’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하나의 사실을 강조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메이저의 연설 속에서 모든 동물들은 ‘우리’가 되었다. 메이저가 전했던 ‘잉글랜드의 짐승들’의 가사는 언젠가 ‘우리가 함께 이뤄갈 미래’가 된 것이다.



  메이저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연설은 여전히 그들에게 유효했다. 메이저의 제자인 돼지 나폴레옹과 스노볼 스퀼러는 그의 뜻을 이어가고자 한다. 동물들을 모아 메이저의 뜻을 전하며 그들은 인간을 몰아낼 때를 기다린다.



  그들의 막연했던 의지는 농장주인 존스의 행동으로 증폭된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채 농장 경영에 의지를 잃은 존스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은 것이다.



  동물들은 결국 치밀한 계획을 행동으로 옮긴다. 예상치 못한 동물들의 행동에 존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들은 드디어 ‘농장’의 주인이 된다.


그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가장 먼저 ‘인간’의 흔적을 지운다.




  그들을 내리치던 채찍, 목줄, 코뚜레가 차례로 사라진다. 그들은 ‘메이너 농장’이라는 이름 대신 ‘동물농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인간의 소유였던 농장은 드디어 ‘모든 동물’의 것이 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메이저의 연설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현재는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된다.



  자유를 얻었고 그들은 인간에게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배당받았다. 노동은 ‘인간’의 주머니가 아닌 그들의 배를 채웠다. 지휘부에 오른 메이저의 제자들은 농장에 체계를 잡아간다.



  인간과 다른 차원인 ‘동물 주의’를 선언하며 메이저의 연설을 토대로 ‘일곱 계명’까지 만든다. 그들 사이에 일종의 법칙이 생긴 것이다.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라는 구절로 시작한 계명의 끝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글자를 익힌 ‘돼지’들의 손에 기록된 계명 속에는 우연히도 하나의 오타가 있었다.


친구라는 글자가
 친고로 적혀 있었다.




독재 아래서


  동물들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노동의 강도가 강해져도 그들 사이에는 불평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망할 것이라는 인간의 예측과는 다르게 농장의 규모는 나날이 거대해졌다. 그들이 ‘욕망’을 제어한 채 노동에 몰두한 대가였다.


문제는 그들 사이에
‘욕망’을 드러낸 ‘지배층’이
고개를 들게 된 이후였다.


  돼지들은 가장 빨리 ‘문자’를 익혔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고 이끌었지만 정작 가장 먼저 인간의 ‘문자’를 흡수했다. 모든 동물들이 ‘문자’를 공부했지만 결국 완전히 글자를 익힌 동물은 돼지들과 ‘당나귀 벤저민’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문자’를 통해 ‘인간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경계하고 배척하던 ‘인간’의 영역은 그들에게 권력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입가에서는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는 메이저의 한 마디가 사라져 갔다.


  때때로 항의하는 동물들에게는 ‘언변’과 ‘지식’을 이용해 현실을 왜곡해 버렸다. 지배층인 그들의 입맛에 맞게 점차 현실을 조작하고 ‘과장’하는 일이 늘어갔다.


  그들은 ‘체계’라는 이름으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메이저의 제자였던 나폴레옹과 스노볼이 주축이 되어 농장을 지배했다. 그들은 풍차를 만드는 일로 자주 대립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물들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 체계가 곧 ‘자유’이며 ‘동물 주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도
욕망이 강한 ‘독재자’가 탄생한다.


  스노볼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만들고자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어린 강아지들을 빼내어 ‘자신이 직접 교육’한다. 


  스노볼은 투표를 할 수 있는 자신의 유권자를 모으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폴레옹은 ‘자신만을 숭배하는’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나폴레옹에게만 반응하게 된 ‘강아지’들은 ‘우리’의 영역에서 스노볼을 쫓아낸다.


  나폴레옹은 가장 먼저 풍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노볼의 제안이 현실적이지 않다며 비판하던 그가 쉽게 자신의 말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그의 결정은 곧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풍차는 곧 동물들이 완성해야만 하는 목표가 된다. 어떤 고통과 차별도 눈에 보이는 '목표' 속에 잊혀간다. 인간들은 그들의 풍차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장 주인도 농장 밖 인간들도 동물들을 '우리 안 동물'로만 여겼으니까.


  농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쳐들어온 인간들은 그제야 실감했을 것이다. '우리 안 동물'들은 더 이상 없었다. 풍차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을 몰아냈을 때보다도 치밀하게 농장을 지켰다. 인간들은 목표로 삼았던 풍차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동물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었다.



  동물들은 인간과 다르기를 원했지만 나폴레옹의 독재가 지속될수록 인간의 영역으로 기울어간다. 농장의 작물을 팔기 위해 인간과 거래를 하고 그들처럼 소문을 이용해 이득을 취한다. 


  절대로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겠다던 선언에서 벗어나 침대에 눕고 ‘모두’의 곡식을 불공평하게 배분한다. 그들의 권력이 비대해질수록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심지어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평등을 외치던 동물들’에게 칼을 빼든다.



  동물들의 새로운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던 ‘독재’와 맞닿아 있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반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친고’하게 만들어 그들을 ‘처형’한다. 자신이 직접 키운 ‘개’들은 동물들 사이에 ‘공포’가 되어 그들의 입을 막는다.


  날조를 거듭하던 스퀼러는 동물들에게 스노볼과 농장에서 쫓아낸 ‘인간’을 들먹이며 동물들에게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한다.


마치 인간 사회의 ‘독재’가
쌓여가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독재’를 막을 수 있었던 여러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글자를 모르는 ‘지배층이 아닌 동물들’에게는 힘이 없었고 ‘글자를 아는 벤저민’은 입을 닫았다.


  뒤늦게 그들이 나폴레옹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독재’가 굳건해진 뒤였다.


  독재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은 ‘우리’다. 우리의 영역은 모든 이들의 사고를 집어삼킨다. 독재의 탄생은 ‘다수’의 사고를 마비시키며 진실을 보는 자의 입을 막는다.



  그들 사이에 유일한 법이었던 계명조차 독재를 위해 손쉽게 고쳐진다. 모두가 평등하다 외쳤던 계명의 마지막은 교묘히 새로운 단어들이 끼어든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독재의 절정에 오른 그들은 과연 ‘인간’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인가?

  돼지들은 그렇게 ‘인간’이 되었다. 두 발로 걷게 되었고 인간과 카드 게임을 주고받았다. 미래를 위해 모든 동물들을 혹사시켜 만든 풍차는 고생을 한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개와 돼지, 아니 지배층을 위한 산물로 전락했다.



  다음 세대들에게 더 이상 ‘메이저’도 ‘스노볼’도 없었다. 기억은 사라졌고 완전히 날조되었다.



결국 동물 농장에 우리는
그들을 ‘우리’에 가둔 것이다.




- 조지 오웰, 동물농장, 민음사

- 그들은 그렇게 인간과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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