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식탁
밤에 비가 쏟아졌다가 아침이 되면 갠다.
그래서 쾌적해지면 좋을 텐데
낮 내내 젖은 행주 속에 머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온몸이 꿉꿉하고 찐득하다.
물을 가득 머금은 대기가 그대로 햇빛에 가열되어 무겁고 뜨겁게 짓누르다 보니, 살갗에 옷이 스치기만 해도 답답하고 목둘레는 하루 종일 끈적거린다.
"꼭 동남아 날씨 같네."
친구들을 만났다.
다들 바빠서 몇 달째 소셜미디어로만 수다를 떨었는데, 한 친구가 학교 강의와 성적 입력 등 봄 학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했고, 마침 또 한 친구가 건강검진 겸 회사 연차를 써서 여럿이 모였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만나기 위해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데, 마지막으로 도착한 이가 들어오면서 동남아 기후를 회상했다.
먼저 온 이는 맞아, 정말 그러네... 동조했다.
음...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다가, 불현듯 나는 통상 동남아라고 분류되는 나라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꼽자면 9년 전 네팔을 갔을 때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에 반나절쯤 거쳐간 정도.
환승을 해야 해서 공항 안에 잠시 머물거나 비행기를 타고 그 위로 지나간 적은 있지만, 실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다녀본 적이 없다.
가까이는 중국과 일본을 수시로 가고(일본은 몇 주 전에도 다녀왔다), 긴 시간 미국에 살면서 중남아메리카를 다니기도 했고, 유럽에 짧지 않게 머무는 등 세계곳곳을 누비고 다녔는데, 동남아는 여전히 낯설다.
이런 나와 달리 주변에는 동남아, 특히 베트남과 태국을 자주 여행 다녀 본 나름 전문가들이 많다.
동남아 어디를 들러볼까 싶어 기웃댈 때, 이들에게 가장 먼저 물어본다.
휴양지, 대도시, 유적지, 현지인 유흥지에 따라, 바다, 호수, 산에 따라, 먹거리에 따라 여행 정보가 자세히 쭉 나온다.
여성 혼자 다니기 안전한 곳, 부모님 모시고 갈 만한 곳, 친구들과 뭉쳐 다니기 좋은 곳 등, 조건과 상황에 맞춘 계획을 짜주는 이도 있다.
그 끝에 싸면서 맛이 달고 진한 과일, 흥겨운 야시장과 길거리 음식, 친절한 지역 주민에 대한 에피소드는 덤이다.
"오래간만에 동남아 음식 어때?"
먼저 온 이가 말했다.
다들 좋아하는 음식이라 크게 환호했다.
블루리본 서베이에서 리본이 두 개 붙은 태국 음식점을 찾았다.
예약을 해야 하는지 전화를 걸었고, 운이 좋아 바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우리가 익히 아는 여러 음식을 시킨 다음 디저트까지 배부르게 나눠 먹었다.
먹는 내내 맛집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방콕, 푸껫, 치앙마이, 호찌민, 다낭 등에서 먹은 커리와 쌀국수의 향, 진한 육수의 맛, 입에 착 감기는 조미료와 향신료에 대한 기억이 흘러나왔다.
동남아 음식 대부분을 미국의 식당에서 처음 맛본 나 역시 친구들 말에 보태어 떠들었다.
시끌벅적한 대화의 결론은 이랬다.
간이 맞고 맛을 대체로 잘 구현했지만, 이건 한국식 태국음식이다!
우리는 동남아 음식의 찐 맛을 운운할 만큼 그곳을 잘 아는 줄 안다.
사람 모이는 거리마다 백반집은 없어도 태국 요릿집이나 베트남 쌀국숫집이 두어 곳씩 있는 걸 봐서, 그럴 만도 하다.
서울의 여름은 동남아 같다는 평가를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알아듣는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노출 콘크리트 건물 안, 무심한 듯 하지만 신경 많이 쓴 인테리어에 둘러싸여, 봄 카디건을 꺼내 입을 만큼 차갑게 몰아치는 에어컨 바람 아래 앉아, 동남아 어느 시장의 쌀국수 가격보다 훨씬 비싼 음식과 음료를 앞에 두고 나눈다.
간혹 동남아 현지 역사와 정세, 사회를 자세히 공부했거나 진짜 제대로 아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5월에는 태국의 일류 대학이라는 쭐랄롱꼰 대학교 출신의 인권운동가를 서울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민주주의를 향한 대학생들의 끝없는 투쟁과 이들을 억압하는 국가 폭력, 해외 강대국이나 다국적 기업의 자본에 의존해 일어나는 난개발과 둥지내몰림, 서식지 파괴, 노예화에 가까운 토착민 착취, 해외 관광객을 염두에 둔 빈곤 포르노.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앞서 나름 전문가들의 빠삭한 가르침이 생경할 정도다.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도 한다.
이런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을 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다 못해 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모순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또 내 곁에 있는 평범한 이들도 비난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나 자신이 좋을 길을 양심껏 지향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쉽지 않지만.
소비와 소유를 제한하고 명민한 감각으로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일상이 불편해지거나 어떤 말을 하기 어려워질 때 수차례 포기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가까운 이들과 옳은 게 무엇인지 격 없이 대화하고 싶은 갈망을 가끔 느낀다.
서로 다른 입장과 의견이 충돌할 때,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교차하는 현상 자체를 진중하고 여유 있게 같이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문제는 일단, 근본적으로 다들 사는 게 바쁘다.
돈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시간이 없다.
매일 소셜미디어에서 하루 일과를 거의 전부 공유하는 친구들과 몇 달 만에 만날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그 시간의 대가가 돈이라고 생각해 보면, 돈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의식 문제라고 퉁치는 건 반대 입장에서 너무 게으르고 오만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식 태국 음식.
텃밭에 옹기종기 난 채소들을 거두다가, 친구들 좀 나눠줘야겠다고 혼자 되뇌다가, 한국식 태국 음식 같은, 이런 모호한 요리를 그래도 기쁘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친구들이라면,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당장 뭘 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어리석음이다.
"너네 토요일에 우리 집 와서 점심 먹을래?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텃밭에서 딴 토마토랑 오이도 가져가고."
다들 신나서 온단다.
본가에서 보내주신 열무김치와 수박을 가져오겠단다.
고마운 일이지.
어린이 같은 생각이지만, 세계가 이런 우정과 환대에 의존해 작동된다면 꽤 괜찮을 텐데.
대화는 몇 번의 침묵 구간을 거쳐 유연하게 흘렀다.
한 친구는 내가 만난 인권운동가를 그 자리에서 검색해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이들에게도 마음을 나누고, 각자 삶에서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좋은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흠... 어쨌든 아는 대로, 적당히 시작해 보는 거지 뭐.
적당히 태국식 커리, 3-4인분
버터(코코넛오일) 1Ts(15ml)
양파 한 개, 고수 두어 줄기
오뚜기 카레 매운맛
코코넛밀크 400ml, 물 400nl
액젓 1Ts, 설탕 1Ts, 레몬즙(라임즙) 1Ts
애호박 한 개, 매운 고추(청양고추) 한 개
바질 20g(스무 장 정도), 홍고추 한 개
텃밭에 딴 동그란 애호박. 귀엽네.
냄비를 중 약불에 달군 후 버터 한 숟가락 혹은 코코넛오일 한 숟가락을 넣고 녹인다.
여기에 얇게 썬 양파와 다진 고수를 볶는다.
레몬그라스를 구할 수 있으면, 이때 레몬그라스도 다져서 함께 볶는다.
양파가 투명하고 흐물흐물해지면, 카레 가루를 넣고 같이 볶는다.
코리앤더(고수씨앗) 가루가 있으면 한 꼬집 넣고 함께 볶는다.
카레 가루의 색이 짙어지면서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될 때까지 볶는다.
여기에 코코넛밀크 400ml 하나를 다 붓고, 카레 덩어리를 살살 풀어준다.
덩어리가 다 풀어지고 냄비 가장자리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물을 400ml 붓는다.
애호박과 청양고추를 썰어 넣는다.
냄비 가장자리가 다시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액젓, 설탕, 레몬즙을 각 1Ts을 넣고, 간을 맞춘다. 선호에 따라 액젓을 더 넣어도 맛있다.
간을 맞출 때는 세 가지 다 넣고 맞춘다.
바질, 고수, 어슷 선 홍고추를 넣고 불을 끈다.
바질, 고수 향이 향긋하게 진동하고, 코코넛 때문인지 맛이 부드럽다.
밥도 롱그레인 쌀로 하면 더 동남아 느낌이 날 텐데.
그린빈, 가지, 단호박 같은 채소나 새우를 넣어도 맛있다.
근처 태국 음식점 없을 때, 집에서 간단히 맛보고 싶다면 오뚜기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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