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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설 Jul 10. 2023

우울해서 고구마를 구웠다.

‘고구마 굽기’ 3시간의 기록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새벽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그 탓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불면에 시달리거나, 악몽에 시달렸던 다음날에는 유독 우울감이 심해진다. 몸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마음의 컨디션도 덩달아 안 좋아지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필요시약을 챙겨 먹는 날은 하루가 고달프다. 그런 날이 딱 오늘이었다.


오후 내내 잠을 잤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창밖이 어둑어둑 해졌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잠만 잤던 나는 부엌으로 갔다. 뭐라도 먹고 약을 더 먹어야겠는데, 뭘 챙겨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게 침대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찰나, 부엌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고구마를 발견했다.


‘고구마.....?’

갑자기 눈에 들어온 고구마에 꽂혀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울한데, 고구마나 구워볼까?'

의식의 흐름대로 고구마를 굽기 시작했다.


박스에 있던 고구마를 모두 꺼냈다.

흙은 털고, 흐르는 물에 벅벅 씻어줬다.

크고 작은 고구마를 에어프라이어에 테트리스 하듯 잘 맞춰 넣었다.


‘고구마가 잘 익을까?’

‘고구마는 맛있을까?’

‘뒤집어서 또 구우면 성공하겠지?

머릿속엔 온통 고구마밖에 없었다.


그렇게 20분이 흘렀다.

부엌으로 달려가 서둘러 열어봤다.

껍질이 바삭 해진 것이 잘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뒤집어서 20분을 돌렸다.


그리고 또 고구마만 생각했다.

‘다 구우면 식혀서 얼려야겠지?’

‘얼렸다 녹여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는데 정말일까?’

아이스고구마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는 사이 20분이 흘렀다.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하나씩 푹푹 찔러본다.

아주 잘 구워진 것 같았다.

냄새도 좋았다.

딱 군고구마 냄새였다.

그 달콤한 고구마 냄새를 맡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갑자기 고구마에 꽂혀서 밤새도록 집에 있는 고구마를 다 구워버렸다.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다가 익으면 빼서 식혔다가 냉동실에 넣었다. 또 구웠다가 식히고, 냉동실에 넣고.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고구마 굽기'를 단순반복하며 나는 고구마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구마를 구웠던 3시간 동안 잠시 우울감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구마를 굽고, 그 시간 동안 고구마만 생각했을 뿐인데 기분이 나아진 이유는 뭘까. 고구마의 달콤한 향이 올라와서 기분마저 좋아진 걸까? 아니면 고구마를 굽고, 식히고 얼리고. 이 단순반복의 과정이 나를 힘들게 했던 우울한 감정들을 잠시 잊게 해 준 걸까? 아니면 고구마가 생각보다 너무 잘 구워져서 으쓱하던 성취감이 우울감을 이겨버린 걸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우울한 기분이었던 그 순간, 우연히 눈에 들어온 고구마를 굽고 싶었고,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구웠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을 뿐.


사실 우울함이 온몸을 지배했을 때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그리고 무엇을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밥도 먹기 싫고,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드라마나 영화도 보기 싫다. 더 심한 날은 병원도 가기 싫을 만큼 무기력해진다. 축축 처지는 기분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든다.


하지만 이럴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은 어떤 행위가 신기하게도 우울감을 해소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별것 아닌 고구마 굽는 일이 잠시나마 나의 우울감을 해소 켜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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