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서함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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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_pm08:58

by 강민선


사서함 31에서 언급했던 저자 간담회를 오늘 무사히 마쳤다. 무사하다는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작년에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사업의 한 책 선정단으로 활동하면서 추천했던 책이 최종 도서로 선정되는 바람에 저자 간담회를 진행하는 부담까지 안게 되었다. 큰 부담이었다. 올해 들어서 첫 번째 부담이 설 명절이었다면, 그에 버금가는 두 번째 부담이 바로 이것이었으니. 요 며칠 글을 쓰지 못한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다면 말 다했지.


그리고 이젠 편안히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얼마나 무사한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어제는 편두통까지 찾아왔다. 한 번 오면 안구 뒤쪽에 총알이라도 박혀 있는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오는데 이건 백 프로 스트레스 때문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오늘 간담회를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자 카드를 만들어서 읽고, 읽은 것을 녹음하고, 녹음한 것을 듣고, 들으면서 보탤 말을 집어넣고, 빼고, 옮기고를 반복했다. 떨거나 실수하지 않으려면 연습과 반복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밤에는 테라플루를 마시고 일찍 잤다.


간담회는 오늘 오전 10시. 시민청에는 9시에 도착했다.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 기다리면서 한 번 더 연습했다. 20분쯤 다시 가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강연자와 사회자 석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앉아서 사회자 카드를 다시 펴보았지만 이제부터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9시 30분쯤 되자 프로필 사진과 똑같은, 작고 귀엽고 눈빛이 반짝거리고 검정색 긴 머리에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늘의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번역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눴다. 나를 보고 적의 없이 활짝 웃는 얼굴, 옆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과 손수건과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 놓는 작은 손을 보면서 나는 애초에 계획했던, 절대 알은체하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을 죄다 털어놓고 말았다. 사실은 당신이 일했던 인터넷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것과, 이미 당신은 그만두고 없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는 것과, 지금도 그곳에서 일하는 누구의 아내라는 것까지 죄다.


왜 그랬을까. 왜 계획이 단숨에 바뀌었을까. 그냥 모른척해도 간담회를 진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냥 모른척했다면 또 어땠을까. 그래도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었을까. 알은체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내가 당신과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이가 아니라, 이 기회가 아니었으면 만날 일도 없는 번역가와 사서가 아니라, 이전부터 아주 조금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런 후회는 하지 않은 채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의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쓴다. 도서관 사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대중들 앞에 서는 첫 자리였고, 명사와 함께하는 첫 자리였고, 나만 알고 있던 사람에게 나의 존재를 알린 용기 있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실은 당신을 원래 알고 있었고,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을 내가 잘 알고 있고,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누군가가 내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반갑기만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걸 아주 싫어할 수도 있다. 상대가 불쾌함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그걸 말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 또는 어떤 믿음이 작용해서일 텐데 그 근거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녀가 내 옆에 앉는 순간 술술 나왔다. 이랬고요, 저랬고요, 사서는 생각보다 힘들고요, 원래는 글을 쓰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만 했었는데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까진 대체 왜 한 거지?

번역가의 편안함과 우아함, 어조의 따뜻함, 용어의 신중함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웠고, 안전했고, 희망적이었다. 그렇게 느끼게끔 해준 것에는 번역가의 역할이 가장 컸다. 그 책의 주제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 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번역가를 만난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 함께한 사람들 모두 그런 표정들이었는데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더불어 오늘 처음 만난 번역가에게도, 나의 느닷없는 알은체에 반갑게 악수를 청해주었던 그분에게도 오늘이 좋은 날로 기억되기를.


이로써 올해의 두 번째 부담이 해소되었다.

부담은 계속 다가올 것이다. 바통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녀석들도 눈치가 있는지 한 번에 동시에 오지 않는다는 것. 단 하루, 혹은 반나절뿐이라도 시간차가 있고 순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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