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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Mar 05. 2021

봄동이 배추요, 배추가 봄동이니

품종이 따로 있지 아니하다. ( feat. 동지나물 )


끼니 챙기는 일에 열심인 편은 아니다. 때운다는 말이 찰떡같은 삶을 살았다. 노는 게 좋았고, 놀기 위해 벌었고, 벌기 위해 먹었다. 만화방 시절엔 떡라면이면 족했고, 피시방 시절엔 샌드위치면 족했다. 자취 때는 편의점이 좋았고, 초년생 땐 사주는 음식이면 - 프랑스산 달팽이를 포함하여 - 뭐든 먹었으며, 야근을 밥처럼 먹을 때 함께 먹던 신사동 홍미닭발 정도를 추억한다. 엄마가 되고부터 아이들이 먹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인간의 쓸모란 여분의 시간을 만들어 내야 얻게 되는 것인 줄로 알았다. 끼니의 시간을 아껴 쓸모의 시간으로 재생산했다. 끼니에 쓰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뭐든 했다. 끼니를 위해 하루를 사는 시어머니(이하 순화 씨)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배달의 민족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 곳곳에 산지를 둔 갖가지 채소와 과일을 어느 때보다 프레시하게 문 앞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시대에 나도 한 발짝 같이 걷고 싶은 심정으로 산다. 이보다 더 간편할 것으로 생각되는 만능 알약의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애석할 뿐. 누군가 이미 누리고 있을진 모르겠으나 단 한 알의 알약으로 건장한 몸과 배고픔을 달래주는 일은 주변에서 본 기억이 없기에, 바라는 건 그만 두기로 한다. 살던 대로, 외식을 하고, 배달음식을 먹고, 편의점을 찾으며, ‘대체로’ 집밥을 해 먹는다. ‘대체로’가 수식하는 집밥에 대한 사연이 순화 씨를 만나면서 뫼비우스 띠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제외하곤, ‘대체로’ 내 끼니 생활엔 큰 변화가 없다.


‘대체로’ 무난하게 살던 며칠 전, 찬이의 등교를 봐주고 돌아오는 길에 순화 씨를 만났다. 현관 앞에 배추를 놓고 돌아가는 길이라 하셨다. 얼마 전 냉장실에 들어앉은 배추 한 통이 두둥실 떠올랐다. 또 다른 배추 한 통이 불과 엊그제까지 사이좋게 앉아 있었음을 떠올렸고, 썩소가 함께 떠올랐다.


있는 걸 먹는 삶이 아니라, 먹고 싶은 걸 먹는 삶을 살고 싶었다. 대단한 걸 먹겠다는 건 아니다. 주신 배추를 데쳐먹고 끓여 먹고 지져먹고 나면, 아연이가 먹고 싶다던 쌀국수를 해 먹을 요량이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음식들을 따라먹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주신 배추를 데쳐먹고 끓여 먹고 지져먹고 나면, 찬이가 먹고 싶다던 스파게티를 해 먹을 계획이었다. 쌀국수엔 뭐다? 숙주나물! 스파게티엔 뭐다? 루꼴라! 구색 없이 먹던 생활에서 벗어나, 구색을 갖춰 먹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랄까, 그런 것이었다.


집으로 배달까지 해주는 고급진 식자재 공급원을 두고 감사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먹고 싶은 자유를 빼앗긴 슬픔이 매몰차게 밀려왔다. 드디어! 배추 한 통을 남겨 두기에 이르렀건만, 다시 새로운 배추 한 통 리필이라니. 지쟈쓰! 데쳐먹고 끓여먹고 삶아먹고 지져먹고 난 뒤라 또다시 데쳐먹어야 할지 고민이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누군가 수긍이라도 해줘야 밥 지어먹을 힘이 날 것 같았다. 배추라는 식자재의 굴레 속에, 우리의 식생활은 뫼비우스 띠의 지루한 루틴 속으로 영영 빠져드려던 차였다.



이번엔 튀겨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며 열어 본 현관문 앞엔 빨간 소쿠리가 있었다. 안에는 배추일 것이 뻔한, 초록색 덩어리 한 무더기가 있다. 소쿠리를 힘차게 들어 올리며 식탁으로 향하는데 뭔가 다르네?! 생나물이 아니다. 이미 데쳐진 배추다!!!!! 


한 달 전쯤이었다. 땅을 호미로 일궈 씨를 뿌린 뒤, 잡초들을 뽑아내고 벌레를 조롱하며 키운 배추를 뽑아다 다듬고 씻어내고 데쳐서 종종종 한입 썰기까지 마친 고귀한 자태의 그것. 이웃에 나눠주기도 애매한 상태의 배추 데침을 한 아름 안고서 식탁으로 성큼 걸었다. 어쩌겠나. 이미 우리 식탁 위로 올려진 이상 소중한 음식에 궂은 내를 풍길 일은 아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주 더! 열심히 배추를 먹어보기로 했다. 냉동실 빈자리를 물색하고, 소분을 준비했다. 초록색 무더기의 비닐을 한 꺼풀 벗겨냈다. 아니 이런! 이건! 배추가 아니다, 동지나물! 동지나물이다! 씹으면 달콤하고, 음~하고 소리를 내면 고소한 맛까지 나는, 바로 그 동지나무울~





순화 씨는 대체 왜 동지나물을 두고, 배추를 두고 갔다 한 걸까. 안 그래도 지난주 이미 받아먹고 있던 동지김치통이 비어 가는 게 영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순화 씨표 동지김치는 이 맘때를 몸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 언제부터 동지 김치를 좋아하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동지김치 없는 봄은 없을 것만 같다. 동지나물이 이렇게나 반가운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이 계절, 딱 보름 정도밖에 맛볼 수 없는 제철음식이라는 점에서 반갑다. 동지야! 반갑다! 순식간에 썩소는 거두고 반색하며 젓가락부터 찾는다. 그릇에 옮겨 담을 새도 없이 집어 먹은 동지나물은 가슴이 먼저 먹는다. 양념 없이 데치기만 한 동지나물이 몸속을 개운하게 한다. 아침으로 먹은 껍껍한 삶은 계란을 밀어내며 위장을 달래주니, 입으로만 먹던 음식을 몸으로 먹을 줄 알게 된 기분이랄까.


반색의 기운을 담아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이거 동지나물이네요. 와~ 너무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순화 씨는 배추라 하지 않더냐며, 맛있게 먹으면 됐다고 간단하게 전화를 끊었다.

‘배추라 하지 않았느냐고?!’

입안 가득 나물을 넣고 우물거리며, ‘동지나물’을 검색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동지나물은 제주도 향토음식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이다’라고 되어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단다. 심지어 동지나물이라는 말도 제주 방언이란다. 동지나물.  서울 사람들은 안 먹는 나물이란 얘기다. 서울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물이란다. 잡것들이 다 실린다는 나무 위키엔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나에겐 배추나 진 배 없는 동지나물이 이런 존재였다니.


서울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었다. 동지나물이 제주도에만 있는 거냐고. 그렇단다. 서울에선 동지나물을 사려고 해도 구경조차 못 한다고. 그 귀한 걸 사돈님이 가져다주셨냐며, 감사하다 하셨다. 아니, 왜 이 맛있는 동지나물을 서울 사람들은 안 먹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엄마는 이야기했다. 동지나물이라고 검색을 해도 어떤 나물이라고 안 나온다고 했더니 동지나물이 배추라 했다.


응? 겨울을 난 배추가 벌어진 잎의 가운데에서 새롭게 올라오는 동(순)을 꺾은 것이 동지나물이란다. 서울 사람들은 그 동(순)이 올라오기 전에 뽑아 먹어서 봄동을 먹는 것이고, 제주 사람들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새로운 동(순)이 올라오면 그걸 꺾어서 먹는데 그게 바로 ‘동지나물’인 거라고. 누구에게도 몰랐단 얘기하지 말라며 헛헛하게 끊으셨다. 배추도 모르는 딸을 시집보낸 당신의 부끄러움 때문일 테지. 동지들이여~ 봄동 한 두 개 뽑아 먹고 나머지는 좀만 기다려보시라. 어느새 돋아난 새 순을 딱 잘라먹는 순간, 매년 기다리는 맛에 빠져들지니!




동지나물을 잘라먹은 흔적



다시 검색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봄동은 노지에서 월동하여 잎이 결구 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개장형으로 펼쳐진 상태의 배추.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배추이든지 노지에서 겨울을 나며 자라고, 속이 꽉 차지 않아서 결구 형태를 취하지 못하며, 잎이 옆으로 퍼진 개장형을 띤 배추를 가리킨다. 달고 사각거리며 씹히는 맛이 좋아 봄에 입맛을 돋우는 겉절이나 쌈으로 즐겨 먹는다.’라고 되어 있다.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나물도 배추고, 봄동도 배추란다. 같은 씨를 뿌려 나는 같은 품종의 나물이지만, 수확하는 시기가 달라 맛과 모양이 다를 뿐이었다. 배추의 겉잎을 떼어 말리면 우거지가 되듯, 수확하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맛도 질감도 달라지는 나물의 신비를 이제야 깨닫는 마흔의 아줌마가 바로 나다. 동지나물, 배추, 봄동이 모두 다른 품종의 나물 종류인 줄로 알고 사십여 년을 살았다. 모르고 죽었으면 서운 했을까. 그보다는 엄마가 많이 부끄러워하셨을지도.



동지나물은 이렇게 반가워하면서도 늘 먹는 배추가 달갑지 않은 건, 다르게 먹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늘 배추만 먹으니, 숙주나물이 먹고 싶고 루꼴라가 먹고 싶어 지는 것처럼, 늘 배추만 먹다가 새로운 순이 올라오면 같은 배추라도 달리 먹고 싶었던 조상들의 지혜로움이 담긴 먹거리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봄동의 상태에서 뽑아 먹지 말고, 조금만 더 애태우며 기다리면 더 부드럽고 단맛이 나는 동지나물을 얻는다 생각하니 ‘기승전아들’로 귀결되는 이 내 마음은 나의 정체성이다. 먹거리를 보며 자식 생각하는 순화 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느긋하게 동지나물을 기다리는 제주 사람들의 마음처럼, 찬이도 조금만 애틋하게 기다리면 색다르게 단맛을 내는 동지나물 같은 녀석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봄동과 동지나물과 배추와 시래기처럼, 사람도 쓸모를 다하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고 그 매력 또한 다름이다. 사람 사는 일이 배추의 품종이 다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빛나는 저마다의 시기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도리다. 남들이 모두 빛을 보며 날아간다고 번데기로 오랫동안 쭈그리고 있다해서 어서 날으라 할 이유는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찬이만의 매력 있는 맛’이 나는 아들이 되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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