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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Feb 03. 2020

그녀 품에 안기기 위해 #2

  열 시까지만 해도 실내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열한 시 가까이 되자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이를 안고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다. 게다가 여직원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므로 내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저기…… 유미 씨…….”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다음 입을 열었다. 사랑이를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저…… 유미 씨를 좋아합니다.”


  잠시 머릿속에서 좀 더 멋진 표현이 없을까를 고민했지만 결국엔 기초적인 문장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저도 소진 씨 좋아해요.”


  그녀가 가볍게 말을 받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상 손님이 아니라서 좋아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하기 위해 애썼다. 싱글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이럴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런 고백을 얼마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십 년도 훨씬 더 지났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왠지 두꺼운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가망 없는 싸움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허망함도 밀려왔다. 순간「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떠올랐다. 구로프와 안나는 유부남, 유부녀인데도 적극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던가. 그런데 결혼하지 않은 처지끼리 두려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물결쳤다. 그러자 용기가 부풀어 올랐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미 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저는 결혼…… 별로 생각이 없는데…….”


  그녀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개인적으로 생각이 없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요즘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몇 명인지 아세요? 0.8명이에요, 0.8명. 두 사람이 만나서 한 사람도 잇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가속화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 나라는 그냥 망하는 겁니다.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에요. 지금 가능성 있을 때…… 우리는 소명의식을 지녀야 해요.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술술 새어나왔다. 내가 언제 나라를 걱정하며 살아 왔던가, 하는 의구심이 잠시 일렁였지만, 그런 의구심은 맥주잔에 따른 다음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그녀는 대꾸 없이 사랑이를 쓰다듬다가 나를 보다가 주방 쪽으로 시선을 옮기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더 밀어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동거면 뭐 어떻습니까. 유럽 같은 경우는 결혼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는 비중이 사십 퍼센트가 넘는 나라도 있다고 해요.”


  “그런 나라는 복지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약간 공격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무관심한 반응보다야 나았다. 두꺼운 벽에서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문을 발견한 것 같아 설레는 기운이 발가락 끝을 간질였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문고리에 적합한 열쇠를 확보해야 할 터였다. 이제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나는 잠시 고심했다. 말실수를 한다거나 하면 말짱 헛일이 되고 말 게 아닌가. 


  그때 남자 한 명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래요.”


  남자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 삼십 분이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잠시 호흡을 골랐다.


  “우선은 유미 씨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니까…… 관심은 있으신지…… 그게 있어야 그 다음 얘기를 이어갈 수 있을 거니까요.”


  “저도 소진 씨한테 호감이 가요. 중요한 건 여건이죠. 그걸 맞추기가……”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쉽지 않잖아요.”


  호감이 간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소진 씨 사진 찍는 일 한다고 했죠? 스튜디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에 버는 돈이 어떻게 돼요?”


  현실적인 얘기로 화제를 돌리면서 그녀가 적극적으로 탐색의 빛을 드리웠다. 가벼워졌던 마음이 금세 다시 무거워졌다. 가능성의 문을 열기가 역시 쉽지 않겠다는 인식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많이 벌 때는 200 조금 넘고…… 적게 벌 때는 100 정도 되고…… 평균 150 정도 돼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300이나 400가량 번다고 거짓말 하려다가 사실대로 고했다. 그러자 그녀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랑이한테 들어가는 돈이 그만큼 되는데…….”


  그녀가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순간 굴욕감 같은 것이 훅 끼쳐왔다. 그냥 이대로 아무 말 없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출렁거렸다. 그러나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인만큼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가능성의 끈을 붙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다 끝났니?”


  그녀가 주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직원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네, 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간판 불 끄고.”


  여직원이 다시 네, 하곤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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