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와 해석의 차이
해석은 언제나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시작된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봐, 또 그러네.”
“결국엔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이 말들은
언뜻 보기엔 '예측'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단절'의 언어다.
왜냐하면 이 말들이 쓰이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어”는
이야기를 끝내는 문장이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석의 종결선이다.
그런데 그 해석은 정말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이미 정해놓은 시나리오의 반복이었을까?
사실상 이런 생각이 숨어 있다:
너는 항상 이런 식이잖아.
내가 틀릴 리 없잖아.
네가 말해도 소용없어. 이미 난 알아.
이건 단순한 오해가 아니다.
이건 사람을 과거에 가둬버리는 말이다.
상대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말을 꺼냈든,
어떤 상황이었든,
내 머릿속엔 이미 결론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설명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상대는 점점 말하지 않게 되고,
나는 점점 ‘내가 맞았다’는 믿음만 키운다.
그리고 이 반복은
언젠가 서로를 완전히 닫게 만든다.
그건 언제나 ‘내가 가진 전제’에서 나온다.
사람은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해석으로 말의 의미를 만든다.
“그럴 줄 알았어.”
이 말은 말하는 사람에게는
확신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다.
왜냐하면,
“이미 너에 대한 내 해석은 완성됐다”는 말이니까.
다르게 말하면,
이 관계에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틈이 없다는 뜻이다.
장면 1.
연인이 퇴근 후 연락이 늦었다.
A는 말한다: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났어. 미안해.”
B는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너 요즘 마음 떠난 거잖아.”
여기서 중요한 건,
A는 지금 설명을 시작하려는 사람이고,
B는 이미 해석을 마친 사람이다.
설명은 더 이상 소용없다.
B는 지금, 사실보다 의심의 전제로 말하고 있다.
장면 2.
친구가 중요한 약속을 깜빡했다.
C: “아, 진짜 미안.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어.”
D: “봐, 역시 넌 그런 애야. 중요하지 않으면 늘 잊지.”
여기서 D는
한 번의 실수를 과거의 성격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C는 지금 상황을 말하려 하지만,
D는 ‘성격 판결’을 내려버린다.
자신의 해석을 믿고 싶어 하는 말이다.
그 해석이 맞다고 느끼면
우리는 안심한다.
왜냐하면 모호함은 불안을 부르기때문인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대화는
모호함을 견디는 공간이어야 한다.
해석을 멈추고,
“혹시 내가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이해로 가는 문을 여는 일이다.
그리고 그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난후에 판단에 도 늦지 않다는걸
잊지 말아라.
그건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해석을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정말 할 말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번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은
그 모든 가능성을 막는다.
과거를 고정시키고,
관계를 닫아버린다.
그 말이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을
지금의 존재로 보지 않게 된다.
오직, ‘내가 아는 그 사람’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사람마다 기본값이 다르다.
이 기본값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투, 기대, 반응, 판단의 방식에 스며 있다.
예를 들어보자.
A는 집에서 "힘들어도 참는 게 미덕이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상대가 힘들다고 말하면
'왜 저걸 굳이 말하지?' 하고 의아해한다.
B는 반대로 "힘들면 바로 표현해야 병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참는 사람을 보면
'왜 저렇게 자기를 억누르지?' 하고 걱정한다.
이 둘은 같은 대화를 나눠도,
기본값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어른 세대는 '가르치려는' 말투에 익숙하다.
말을 하면 “그건 말이지…”로 시작해서,
결론을 정해주는 방식이다.
젊은 세대는 ‘함께 생각하자’는 말투에 익숙하다.
“나는 이렇게 느끼는데, 너는 어때?” 식으로,
대화를 수평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러니 서로의 말투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어른은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고 말하고,
젊은이는 “꼰대 같다”고 피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말투 자체보다,
말 뒤에 숨은 ‘기본값’을 모른 채 평가한다는 데 있다.
문화의 기본값도 있다.
한국 문화에서는 ‘눈치’와 ‘배려’가 중요한 기본값이다.
직접 말하기보단,
분위기를 읽고 알아채야 ‘센스 있는 사람’이 된다.
반면 미국이나 서양 문화에서는
‘직접 말하기’와 ‘자기표현’이 기본값이다.
말을 안 하면 ‘의사 없음’으로 간주하고,
직접 말해야 존중받는다.
이 두 문화가 섞이면
한쪽은 “왜 이렇게 돌려 말해?” 하고,
다른 쪽은 “왜 이렇게 직설적이야?”라고 느낀다.
이처럼 우리는
가정환경, 세대, 문화 속에서
각자 다른 ‘기본 전제’를 가지고 자란다.
그 기본값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리는 상대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거칠게 들릴 때,
정말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만 자라온 걸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대화는 부드러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틀렸다’고 보는 대신
‘다르게 배운 사람’이라고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할 때 생기고,
소통은 다름을 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가정의 언어, 세대의 습관, 문화의 기대는
우리가 말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이걸 감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말은 칼이 아니라, 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너 요즘 왜 그렇게 게을러?"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솔직히, 넌 좀 문제야."
이런 말들은 어쩌면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서’,
혹은 ‘참다 참다’ 꺼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맥락 없이 던진 말은,
상대에게 칼처럼 꽂힌다.
왜냐하면,
그 말이 언제, 어디서, 어떤 흐름에서 나왔는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에는 배경이 있다.
상대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지금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이전 대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려하지 않은 말은
아무리 ‘정론’이라도
폭력처럼 들릴 수 있다.
사람은 ‘사실’을 가지고 상처받는 게 아니라,
그 사실이 어떻게, 언제, 어떤 말투로 나왔는가에 따라
상처를 받는다.
예를 들어 보자.
A: “그런 식으로 말하면 좀 기분 나쁘다.”
B: “사실이잖아. 왜 감정적으로 굴어?”
여기서 B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A는 ‘지금 이 흐름에서 그 말을 왜 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즉,
문제가 된 건 ‘내용’이 아니라 ‘맥락’이다.
대화에는 타이밍이 있고,
존재에는 맥락이 있다.
말은
정확하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적절해야 좋은 것이다.
‘지금 이 말이 필요한가?’
‘지금 이 사람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말이 상처가 아니라 다리로 쓰일 수 있을까?’
이 질문 없이 던져진 말은,
아무리 옳아도
상대에겐 공격이 된다.
말은 칼이 아니다.
하지만
칼처럼 사용할 수도 있고,
다리처럼 건넬 수도 있다.
차이는
맥락을 읽으려는 태도에서 생긴다.
모든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다
“그게 왜 그렇게 들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 말 가지고 왜 그렇게까지 반응해?”
우리는 종종
내 말이 '틀리게' 해석되었다고 느낄 때,
상대에게 수정을 요구한다.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야.”
“너는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그렇게까지 오해할 일은 아니었잖아.”
하지만 생각해보자.
정말 ‘틀린 것’일까,
아니면 ‘다르게 들린 것’일까?
사람은 똑같은 말을 듣지 않는다.
말은 같은데,
그 말을 듣는 귀와 마음이 다르다.
누군가는
“그만해”라는 말을
경계로 듣고,
누군가는
그 말을 애정 어린 요청으로 듣는다.
누군가는
“좀 더 신중하게 해봐”를
기대로 듣고,
누군가는
‘내가 못 미더운 거구나’라는 불신으로 받아들인다.
이건 감정 탓도,
이성 부족도 아니다.
해석은 그 사람의 과거와 상처,
기대와 불안을 통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은
그 말과 비슷한 말로 상처받은 경험이 있을 수 있다.
그 말투와 어조가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날의 피로, 감정, 상황이
그 말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렸을 수도 있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화를 ‘논리의 싸움’으로만 만들게 된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vs 넌 잘못 들었다.”
“나는 옳고, 너는 예민하다.”
하지만 거기엔
이해의 여지, 마음의 여백이 없다.
이 한마디가 대화를 구할 수 있다
이 말은
상대를 이기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내가 그렇게 말해서
네가 그렇게 느낀 거라면,
그 감정은 진짜였을 거야.”
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로 다룰 수 있다.
그때부터 대화는
논쟁이 아니라
조율이 된다.
그러니, 말은 항상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란
“이해해줘”가 아니라
“이해하려고 해볼게”라고 말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열어두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요약 메시지:
오해는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말은 같아도, 듣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다르게 들었을 뿐’이라는 인식은 관계를 지키는 언어다.
대화는 정확함보다 여백 위에서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