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가면 많은 인사이트를 얻게 된다.
다른 문화를 조우하면서 느끼는 ‘이질감’은, 내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해외여행은 일종의 생존게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익숙한 일상과 달리, 모든 것이 낯선 비일상에서는 매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 어렵다. 길을 걷는 방식, 메뉴를 고르는 기준, 사람들의 표정 하나까지도 의식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생존본능과 닿아 있다.
지금이야 우리는 이런 상태를 설렘이라고 부르지만, 몇십만 년 전이었다면 두려움에 가까웠을 것이다. 새로운 동물은 나를 해칠 수 있는 존재일 수 있고, 새로운 식물은 독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적대적인지, 친화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물음표로 다가오는 낯섦은, 안전이 보장된 지금도 여전히 생존본능을 자극한다. 다시 말해,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해외여행을 가면 별것 아닌 것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쉽게 감탄하게 된다. 생존본능은 이때 경계심이 아니라, 인사이트를 포착하기 위한 뾰족한 안테나로 작동한다.
지난 도쿄 인사이트 트립을 함께 다녀온 대표님의 제안으로, 이번에는 이 생존본능을 가장 익숙한 일상인 서울에서 발휘해보기로 했다. 시민이 아닌 관광객의 시선으로 서울을 돌아보는, 일종의 서울 인사이트 트립이다. 관광객의 눈으로 본 서울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1. 춘풍 양조장
삿포로에 갔을 때 삿포로 맥주 공장 투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술을 즐겨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삿포로에 왔으면 한 번쯤 가야 할 것 같다는 묘한 의무감에 방문했다.
거대한 규모에 비해 콘텐츠가 압도적으로 풍부하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맥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브랜드의 역사를 듣고, 그 자리에서 내린 맥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때 처음으로 맥주가 정말 맛있는 술이라고 느꼈다. 경험이 미각을 바꾼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다. 다녀온 뒤에는 이런 투어가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투어가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약수역 근처에는 실제로 막걸리 투어가 가능한 공간인 춘풍양조장이 있다. 삿포로 공장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3층 건물 안에 콘텐츠 밀도가 높게 구성돼 있다. 투어 시작 전 들른 화장실부터 인상적이었다. 과거 우물을 연상시키는 세안대와 한국식 가구가 배치돼 있어, 공간의 톤을 미리 잡아준다.
간단한 위생장비를 착용하고 1층 양조장으로 들어가면 막걸리 제조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효 중인 막걸리의 향을 맡아볼 수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막걸리가 일정 온도를 넘기면 식초처럼 변질될 수 있어 과거에는 장인들이 3교대로 관리했지만, 지금은 센서와 AI 자동화 시스템을 활용해 이를 관리한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시스템이 해외 양조 과정에도 수출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3층으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발효되는 막걸리의 모습을 시각화한 뭉게뭉게한 공간에 달항아리가 전시되어 있고, 관광객이 구매할 수 있는 전통 굿즈가 함께 구성된 작은 박물관이 나온다.
하이라이트는 2층이다. 효모가 발효되며 나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리는 바 공간에서, 도수가 다른 세 병의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가 세팅된다. 이때부터는 도슨트와 대화를 나누며 막걸리를 음미하게 된다. 설명을 들어서였는지, 정말 막걸리가 뛰어나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멜론 향과 풍미가 느껴지는 막걸리는 내가 마셔본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이 서울 시민도 잘 모르는 이런 흥미로운 콘텐츠를 즐기고 있었다니!
2. 소수책방
불황이라는 말이 체감됐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은 더더욱 그랬다. 잠실, 성수, 명동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임대가 붙은 건물과 손님이 없는 가게들이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
독립서점은 특히 그랬다. 한 사람만의 도서관처럼 조용한 공간에, 사장님과 책만 있는 서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은 분명히 존재한다. 막걸리 투어 전에 시간이 남아 들른 소수서점은, 2층에 있고 외부에서는 알아보기 쉽지 않은 위치임에도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에서는 음료를 주문할 수도, 책을 구매할 수도 있었지만 사장님은 무엇을 주문하지 않아도 괜찮고, 편하게 있다 가도 된다고 말했다. 무심한 듯한 태도의 따뜻한 말투가 공간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방문객들에게 질문지를 나눠준다는 것이다. 매달 특정한 주제의 질문이 있고, 이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듯 보였다. 제작 방식은 충격적으로 단순했다. 손님들의 답안지를 스테이플러로 찍어 묶은 형태다. 나였으면 다시 편집하거나 정리된 형태로 만들 생각부터 했을텐데.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효율도 효율이지만 날것의 느낌이 이 공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는 집은, 불황에도 되는 이유가 있었다.
3. 높은산(Noppensan)
번잡한 성수동 메인 거리를 벗어나 전통시장을 가로지르다 보면, 삼각형 모양의 작은 땅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짜이집, 높은산에 도착한다.
“짜이 드실래요?”라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 짜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게 짜이는 인도 음식점에 가면 곁들여 마시는 음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햄버거를 마실 때는 늘 곁들이는 콜라를 따로 마시러 가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콜라 드시러 갈래요?”와 같은 신선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가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과연 사람들이 짜이만 마시러 올까 싶었는데, 막상 가보니 공간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다. 마치 관광객으로 둔갑한 서울시민인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공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사장님이 디테일을 얼마나 챙기는지 알 수 있다. 그 디테일을 찾는 재미는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넘긴다.
우리는 호텔 짜이와 빵을 주문했다. 맛있었다. 빵에 곁들여진 소스에서도 짜이 향이 났다. 짜이라는 핵심을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뚝심이 느껴졌다. ‘높은산’이라는 이름처럼 디테일의 완성도는 산처럼 높고, 공간은 작은 언덕처럼 포근했다.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서울이 꽤 멋진 도시라는 사실을. 관광객의 시선으로 보니, 그 사실이 다시 또렷해졌다.
2026년, 진짜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고 싶다면 이 책도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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