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이 꼭 엄마일 필요는 없으니까
"취직 축하해. 언니가 옷 한 벌 사주고 싶어."
2살 터울 여동생이 있다. 스무 살이 넘도록 둘이 누우면 여백이 남지 않는 방을 같이 썼다. 옷을 몰래 뺏어 입어 전쟁을 하다가도 연애사를 이야기하며 낄낄거리던 사이. 20년을 넘게 내 몸인 것처럼 같이 산 동생이었다. 덜렁대는 나를 챙겨주던 언니 같은 동생이었다. 동생은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나는 결혼을 하면서 우리의 동거는 끝이 났다. 그 존재가 너무 당연해서 형식적인 안부를 묻지 않았다. 내가 잘 살고 있으면 동생도 잘 살고 있는 거라 여겼다. 살짝 열린 방 문틈 사이로 동생을 보기 전까지는. 서랍장 위에는 우울증 약이 약 봉투에 담겨 돌돌 말려 쌓여있었고, 동생은 침대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늘어져 누워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괜찮냐고.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냐고.
"언니, 나 집을 나와야겠어. 엄마랑 같이 있으면 계속 힘들 것 같아."
어릴 적 상처를 같이 살아온 동생이라 마음을 잘 알겠어서 그러자 했다. 첫 째가 세 살이 될 무렵 동생은 우리 집 근처에 직장을 얻었고, 작은방의 동거인이 되었다. 어느 날, 새벽 1시가 넘도록 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았다. 집 근처가 어둑해서 걱정이 되었다. 2시간 넘어가니 걱정이 불안이 되었다. 남편을 깨웠다.
"안 되겠어. 찾으러 나가보자. "
밖을 돌다 차를 타고 회사까지 갔다. 가끔 행사 준비로 새벽 작업을 하기도 했으니까. 역시나 불은 꺼져 있었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혹시나 구석 어딘가에 있을까 싶어서 창문에 눈을 바짝 대고 사무실 안을 기웃거렸다. 어떤 불빛도 없었다. 다시 집. 새벽 4시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했잖아. 왜 이제와. 회사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
"미안, 회식이 있었어. 시끄러워서 전화 오는 줄 몰랐어."
다음날 동생은 말했다.
"언니, 언니한테는 미안한데 나 기분이 좋아. 나 살면서 이런 돌봄은 처음 받는 것 같아. 나 늦게 온다고 걱정하고 회사까지 찾아가고. 고마워."
어릴 때 몸에 베이는 양육당함의 태도는 생각에 이르기 전에 나 자체가 되어 의식할 수 없다. 동생은 비로소 자신이 돌봄 받지 못하고 자랐음을 알게 되었다. 정서적 방임. 나 또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부모를 만나면서 '내가 그 나이에 받아야 할 마땅한 돌봄을 받지 못했구나.' 깨달았으니 동생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스스로 돌보기 위해 아이들을 만나는 직업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치원 교사로, 동생은 어린이 도서관 사서로.
그때부터 같다. 내가 동생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살뜰히 챙기지는 못해도 정서적 돌봄으로 친정 같은 마음을 주자고. 친정이 꼭 엄마일 필요는 없으니까. 존재 자체로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마음은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달려가 돌봐주는 안전하고 든든한 아빠 같은 울타리는 남편이하기로 말없는 합의를 했다. 동생이 결혼을 하고 첫 명절이 생각난다. 시댁으로 가는 동생에게 5만 원을 들려주었다.
"첫 명절 시댁 가는 데 빈손으로 가지 말고, 좋은 사과 한 박스 사서 갖고 가. 친정에서 보냈다고 하고."
부모교육에 하는 말이 있다. EQ가 한참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때였다. '아이들의 정서 통장에 사랑, 응원, 인정과 같은 좋은 마음을 쌓아줘야 내면이 강하고 정서지능이 높은 아이로 자라요.' 나와 동생은 마이너스 정서 통장을 갖고 있었다. 서로 오가는 마음과 말로 우리는 다시 마음을 쌓아가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짧은 말에서 '진한 마음 하나 적립되었구나.' 알 수 있었다.
동생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사하면서 퇴사했다. 동생은 사서로 전문성을 인정받았지만 마음은 많이 지쳐있었다. 첫 해는 쉬면서 마음을 돌봤고, 다음 해는 아이들을 돌봤고, 다음 해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움직였다.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것 같은 일이 불협화음을 낼 때 머리는 시끄러워진다. 마음과 머리가 따로 놀다가 무기력해지면 자존감도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이 시대의 엄마들(전문 직업을 갖고 있다가 육아로 퇴직을 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은 육아 후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이 같은 '육춘기'를 겪나 보다. 이 이야기는 길어질 것 같으니 다음에 따로 써야겠다.
그 시간을 3년. 그러던 며칠 전,
"언니, 나 취직했어. 정규직은 아니지만 사서 일이고 딱 좋아."
기뻤다. 너무 기뻤다. 동생은 근무시간도 짧고 팀장도 아니라고 했지만 이 사건은 엄청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긴 터널을 뚫고 다시 시작점에 선 것이 아닌가.' 기념해주고 싶었다. 첫 출근일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었다. 든든한 지지자들의 응원과 함께 당당하게 서기를 바랐다. 얼마 전 같이 옷 사러 갔다가 마음에 드는 여름 재킷을 못 사고 돌아온 일이 생각났다.
"주말에 집으로 놀러 와."
집으로 온 동생에게 말했다. "취직 너무 축하해. 언니가 옷 한 벌 사주고 싶어." 부모가 자식 첫 취직하면 양복 한 벌 사주며 흐뭇해하는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근처 아웃렛으로 갔다. 피팅모델에게 이 옷 저 옷 대보며 탈의실을 들락날락. 형부가 골라준 옷이 당첨되었다. 연한 초록색 체크무늬의 재킷이 단아해 보였다. 예뻤다. 행복했다. 세일도 안 하는 옷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말하는 동생에게 말했다.
"언니가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이건 옷 값이 아니다. 마음 값이다. 사랑 값이다. 그래서 아깝지 않다. 더 써도 괜찮은 그런 것이다. 첫 출근날 저녁, 언니랑 형부가 사준 옷 있고 첫 출근 잘했다고. 첫날이라 여기저기 인사 다녔는데 옷이 참 잘 맞았다고 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선물박스가 왔다. 박스 안에는 아이들을 위한 포켓몬 잠 옷 두 벌, 초콜릿 그리고 신발 한 켤레.
딸이 병원에 가잖다. 마음이 아프다고. 학교 다니며 치인 마음에 약을 발라줘야 하는 때인가 보다. 상담을 받으러 들어간 딸을 기다리며 신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꼭 맞았다. 편하다. 예쁘다. 어느 옷에나 잘 어울린다. 아니, 이건 신발이 아니다. 마음이다. 통장에 쌓인 마음이 복리가 되어 내게 온 것이다. '언니도 힘내라고, 고맙다고, 같이 잘 걸어가 보자고' 써 내려간 편지다. 여전히 나는 덜렁대고, 그런 나를 동생은 언니처럼 챙겨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언니가 되고 엄마가 되어 마음 통장을 채워주고 있다. 편 가르느라 바쁜 세상에서 "무조건 니 편"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또 살아갈 수 있다.
상담실에서 나온 딸에게 말했다.
"이거 이모가 사준 신발이야. 예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