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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Dec 13. 2020

내 경험과 이해가 나를 만든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을 보통 사춘기 때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나는 좀 많이 늦게 했던 거 같다. 방위로 군대 가서 위병으로 초소 근무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내렸던 나만의 결론은 ‘생존 번식'을 위해서였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이 질문에 채사장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책 ‘담론'에서 ‘공부란 살아가는 것 자체이고, 살아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책을 읽으면서 두 사람이 무언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나만 그런가? 아무튼 그렇다면 “무엇을 배우러 온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법륜스님은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삶은 그냥 주어진 거니 그 의미를 찾지 말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를 고민하라고 한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에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다 맞는 말 같다. 보통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철학에서 많이들 찾는데, 그렇다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얼까? 채사장은 그건 바로 ‘주체와 객체의 문제’라고 말한다. 나와 타인, 나와 세계에 관한 문제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나이고, 객체는 타인이나 세계가 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인데 그 무언가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어떠한 거'라는 깨달음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주체인 나는 무엇이고, 객체인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관조자, 즉 '보는 자'이고, 세계는 그 실체가 아니라 나의 뇌가 해석한 그림자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두 세계가 만나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소통이 어렵다. 이것이 외로움의 본질이며,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세계를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진짜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결국 채사장이 말하는 깨달음은 ‘세계란 내가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나와 세계는 같다’는 고대 인도 힌두교 경전인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을 말한다.


사실 이런 깨달음은 현실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데 실용적으로 적용해 볼 때 의미가 있다. 현재, 과거 또는 미래에 사는 사람이 있는데, 과거에 사는 사람들은 후회나 그리움 속을 살아가고, 미래에 사는 사람들은 희망이나 불안 속을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어떤 시간대를 살고 있나? 그걸 결정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런 깨달음이나 이해의 앞에는 반드시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체험이 없는 이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인데, 결국 체험이 없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닌 것이다. 어릴 때 이해할 수 없던 책들이 지금 읽으니 깊은 감동이 오는 경우가 있다. 책을 읽어야 할 때가 바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다음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경험이 이해를 만든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도 ‘담론’에서 ‘이론이 실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모으면 이론’이 된다고 했다.


죽음도 마찬가지인데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3년간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며 이런 삶에도 의미가 있을까 항상 고민했는데  '죽음이란 하나의 지점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또 다르다. 그게 역설적으로 삶이다. 이런 모든 깨달음이 다 경험을 해야 느낄 수 있다. 결국 내 경험과 이해가 나를 만든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난 또 어떤 경험을 쌓아 나가야 할까? 그게 문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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