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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02. 2023

잘 먹는다는 것.

70대까지 40대의 몸으로 살길 바라는 아줌마의 필라테스 이야기 8

"다이어트를 잘하기 위해서는 운동도 중요하지만 잘 드셔야 해요."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귓가를 계속 맴돈다. 잘 먹어야 한다는 말에 온갖 맛난 음식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입 속에서는 아밀라아제가 폭발한다. 연애 시절부터 이것만큼은 잘 먹는다며 짝꿍이 자주 사준 삼계탕, 파사삭 소리 나는 후라이드, 매콤 달짝한 소스에 버무려진 양념치킨, 진한 치즈향 가득한 피자, 부드럽고 쌉싸름한 티라미수, 캐러멜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 캐러멜마끼아또, 빨간 떡볶이, 늦은 오후 혼자 먹는 라면. 요런 건 낮 동안 건전하게 먹을 수 있는 맛난 것들이고, 어둡지만 반짝이고 활기에 찬 밤이 되면 더 맛난 것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일단 쏘주는 기본. 쏘주를 빛내주는 지글지글 삼겹살, 쫀득쫀득 곱창, 사르르 녹는 한우, 매콤 달콤 골뱅이, 바다향 가득한 회와 해삼, 전복, 소라. 입가심으로 볶음밥, 매운탕, 냉면. 세상에는 참 맛있는 것들이 많다. 생각만 해도 즐겁고 재밌어진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팡팡 터진다.


그러나 선생님이 잘 먹어야 한다고 한 것은 결코 이런 것들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지방과 무기질 및 각종 비타민들과 섬유소들이 잘 결합된 알록달록 예쁜 색감의 풀떼기들과 닭가슴살과 견과류 등일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폭죽들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살을 빼려면 죽을 만큼 운동하고 죽지 않을 만큼 먹어야 한다는 말이 폭죽이 사라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런저런 먹거리들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이미 난 마트 앞에 서 있다. 내가 늘 가던 마트에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른 비장함으로 마트 안에 발을 디뎠다. 선생님이 잘 먹어야 한다는 말에 어울리는 닭가슴살을 사러 왔으니까. 그런데 어라~ 닭가슴살 품절. 나의 비장함이 피이익~ 소리 내는 구멍 난 풍선처럼 사그라들어버렸다. 세상에 이렇게나 닭가슴살을 찾는 이가 많단 말인가. 오늘은 복날도 아닌데. 인간의 다이어트와 건강한 몸을 위해 희생된 닭들을 위해 마트 앞에 위령비라도 세워줘야 할까 보다. 마음 같아서는 마트에 있는 닭가슴살을 몽땅 사버리는 플렉스를 하고 싶었으나 예상치 못한 품절로 인해 실망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손을 씻고 소파에 바르게 앉아 핸드폰을 양손으로 꼭 쥐고 앱을 열었다. 더 많~은 닭가슴살을 만날 수 있는 온라인 쇼핑 앱으로 돌진했다.


종류가 다양하겠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다양한 닭가슴살이 있다니. 10년 전쯤 짝꿍이 헬스를 시작할 때 난 매일 아침마다 닭가슴살을 삶았다. 진짜 생 닭가슴살을. 그리고 헬스 선생님이 알려주신 레시피에 따라 각종 채소와 달걀을 찌고 삶아 하루에 도시락을 두 개씩이나 쌌다. 나는 짝꿍을 사랑하니까. 정성이 하늘을 찌르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 싫어졌다. 아마도 꾸준히 오랫동안 닭가슴살과 함께 해야 할 것 같아서 충분히 편하고 맛있는 방법으로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냐고? 다이어트는 성공도 어렵지만 그 성공을 유지하는 건 평생토록 해야 하는 것이므로. 70대를 맞이한 나의 최여사도 아직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진정으로 다이어트는 필생의 과업임이 틀림없다.


닭가슴살을 잔뜩 주문하고 나서 급한 대로 냉장고에서 잘 먹는다는 것에 어울릴만한 것들을 꺼내어 차려본다. 삶은 달걀을 반으로 잘라 노란색과 흰색이 예쁘게 보이도록 접시에 담고, 그 옆에 초록초록한 오이를 어슷 썰기로 썰어 담고, 빨간 방울토마토를 앙증맞게 담고, 영롱한 갈색이다라고 주문을 걸며 평소 멸치 볶을 때나 눈길이 닿던 아몬드도 옆에 담았다. 그리고 커피에만 넣어 먹던 우유도 크게 한 잔 따라 접시 옆에 놓았다. 썩 괜찮은데... 색감도 예쁘고... 식탁에 앉아 아무 클래식이나 잔잔한 것으로 틀었다.


참 오랜만이다. 나만을 위해 차린 식탁. 직업이 부모교육 강사이다 보니 늘 엄마들을 만난다. 엄마의 자존감이나 스트레스에 관한 강의를 할 때면 내가 꼭 강의 끝에 당부하는 것이 있다. 혼자 식사를 하더라도 꼭 잘 차려서 잘 드시라고... 내가 나를 대접해 주지 않으면 내가 나에게 토라져 우울함이 뿜어진다고... 내가 했던 말인데 오늘은 오롯이 나를 위해 실천해 본다. 한 젓가락 먹으며 내 안에 건강을 키우고, 또 한 젓가락 먹으며 내 안에 자존감을 키운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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