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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 권분자

콩트

by 권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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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권분자



어머니는 텅 빈 마당을 가리키며 덜덜 떨었다.

“마당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누워있어.”

“저건 사람이 아니고 나뭇잎이야”

수북하게 쌓인 단풍잎에서도 어머니는 과거를 보았다.

치매 환자의 기억은 때때로 딸의 현실마저 흔들어 놓았다.

나는 어머니의 환각을 현실과 구분하려 애썼다.

어머니의 환각 속에는 사랑 받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다.

무릎과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어머니는 꾸짖었고,

아버지는 아이를 위로했다.

환각은 밤마다 찾아왔고, 나는 어머니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평생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환각이고 가짜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내 생각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감할 수 없는 벽이라 여겼다.

어머니는 죄책감에 갇혀 살았고, 나는 어머니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에 갇혀 살았다.

어느 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늦도록 TV를 보고 있었다.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넘겼을 무렵, 정적이 깨졌다.

“똑똑”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밤에 누구지? 나는 TV 소리를 줄였다.

“똑똑똑...”

소리는 반복되었다. 내 방 창문 밖은 좁은 통로뿐이었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이 밤에 누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노크소리는 십여 분간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의 환청이 내게 전이되었거나 혹은 밤의 공포가 빚어낸 착각이라 여기며 다시 TV에 집중했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딱히 잘못한 일이 없었다.

“왜 문을 열어주지 않은 거야! 비 맞으면 감기 걸리는 것도 몰라?”

“무슨 말이야?”

“어젯밤에 창문을 그렇게 두드렸건만…,”

“어젯밤? 그게 엄마였어?”

“비가 쏟아지는데 아이를 밖에 두면 어쩌자는 거야?”

“아이? 그리고 어제는 맑았는데?”

나는 어머니가 또 환각을 본 것이라 생각했지만,

문득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유리창에는 커다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자국은 빗물에 젖어 얼룩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어젯밤 TV에 몰두한 채, 빗소리와 어머니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어젯밤 어머니의 절박한 노크소리를 있을 수 없는 소리로 치부해버렸던 것이다.

늦은 밤, 어머니는 환각 속에서 빗물에 젖어 떨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그 아이가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는 절박함으로 달려 나와 필사적인 구원 요청이었다.

나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정상인이라는 생각에 갇혀,

어머니의 말은 환각으로 단정 지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나는 내가 인지하는 현실이 진실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내 현실이야말로 피로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착각이었다.

창문에 남은 젖은 손자국은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증거였다.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하는 내 간병은 실패를 증명했다.

어머니는 환각 속 아이를 구하지 못한 슬픔과 딸에게 버려진 좌절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치매는 어머니의 기억뿐만 아니라, 나의 이성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불완전한 착각에 불과한지를 깨달았다.

어머니의 환각은 과거의 고통을 투영하지만, 내가 겪은 그날은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새벽 한 시였고 맑은 날이라고 오인한 나의 착각이, 나의 현실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았다.

“왜 열어주지 않은 거야! 비 맞으면 감기 걸리는 것도 몰라?”

어머니의 분노는 환각만이 아니었다. 환각 속 빗물에 젖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내 창문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나는 정상인이라는 오만함에 갇혀, 어머니의 절박한 현실을 묵살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어머니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 놓인 단절의 벽이었다.

어머니의 환각이 과거의 슬픔을 담았다면,

나의 착각은 현재의 피로와 단절을 드러냈다.

창문에 남겨진 젖은 손자국은 미스터리이자 영원한 질문으로 남았다.

치매는 환자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간병인의 세계까지도 취약하고 불안정했다.

그리고 그 경계의 벽 너머에서, 각자의 고독과 착각 속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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