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여섯명의 동료들이 작업 준비를 하느라 하루종일 동분서주하는 부서가 있다.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는 부서다. 누구하나 잔꾀를 부리는 이도 없고 어떤 지시가 있든 참으로 성실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서로 아끼면서 격려하고 도와주는 모습이 항상 고맙고 미안했다. 감사하는 마음과 특별한 혜택을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마음이 뒤섞여서 그 부서를 가게 되면 나는
“여러분 사랑합니다!!”를 외쳤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의 날들은 다같이
“저희도 사랑합니다”로 받아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저는 아무나 사랑하지 않습니다!!”를 단호하게 외쳤다. 같이 있던 동료들의 당황한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다. 순간 공간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도 속으로는 몹시 당황 했지만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나는 그 팀원을 보면서
“나를 사랑해 줄때까지 내가 먼저 사랑할께!!”를 크게 외쳤다. (작업장이 소음이 심해서 작게 얘기하면 전달이 되지 않는다.)
머쓱한 기분으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며칠동안 어색했던 그 순간이 자꾸 떠 올랐다. 그 부서를 가려면 마음 가짐을 고쳐 먹고 들어서곤 했다. 나를 자꾸 돌아보았다. 마음을 다 보일 것 까지는 없다. 그래도 사람 존중하는 마음이 내 마음의 기본 베이스다. 아직 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덜 갖추고 있는 것인지 반성했다. 말은 곧 마음의 표현이다. 듣는 사람이 진심을 느끼지 못했다니 미안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문자하나를 받았다.
“저번에 죄송해요.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하니까 믿음이 안가서 화가 났어요. 정말 우리를 사랑 하는 게 맞아서 저렇게 말하시나? 의심했거든요. 맘에 없는 말을 해 버리고 며칠 동안 미안이를 안고 있으려니 제가 더 힘들어요.” 나는 바로 답을 했다.
“나는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고 여겨져서 그날부터 더 좋아하게 됐는걸요.~~”
나는 내 마음이 어설퍼서 미안이(미안한 마음)와 동행중이었는데 동료는 나에게 불편한 말을 해 놓고 자신이 더 미안이와 동숙을 했던 모양이었다.
문득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래 너는 그걸 참 잘해. 너는 참 그것도 잘해.’ 나와 나이가 같은데 친구는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심한 성격 탓에 의사표현을 못하고 뒷전에서 전전긍긍하는 내게 친구는 어른 같은 격려를 하곤 했다. 어린 날 엄마 손보다 더 많이 손을 잡고 다녔던 친구이다.
그녀는 희한하다. 타국에 살다온 그녀를 이 십 여년 만에 불현 듯 만나도 어제 만난 듯 반가웠다.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자주 하지 못한다. 지금은 먼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 시간을 못 맞춘다.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얘기가 쏟아진다. 어제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가듯 자연스럽다. 평소에 둘 다 말 수가 적은데 둘이 만나면 수다가 끝이 없다. 만나러 갈 때부터 끌어안고 반가워 할 생각에 마음이 저절로 들뜬다. 전생에 연인이었을까. 감정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하는 나인데 이 친구에게는 얼마든지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다.
가끔 전화기 너머로 간단한 안부를 물어도 가슴이 스르르 따뜻해진다. 뜬금없는 문자 한줄 날아와 있어도 저 너머 나를 보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말 못할 가슴앓이도 그 친구 곁에 가면 말을 다 해버린 듯 속이 후련하다. 말하지 않아도 치유되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친구다. 그냥 마주보는 게 치유다. 언제나 진심으로 나를 응원한다. 언제나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래서 무한대로 이 친구에게 무너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걸까? 내 아이들에게 동료와의 일화를 얘기하니 우리 둘째가
"우리엄마 참 별나셔~. 동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얄밉게."
나는 놀래서
"얄미운거야?"
"엄마 , 일이 힘들어 죽겠는데 사랑합니다. 하면 누가 좋아 하겠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나 자신에게 바람은 있다. 내 친구처럼 바라만 봐도 치유가 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곁에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그런 사람이고 싶기는 하다. 어떤 표현을 해도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 이고 싶다. 욕심일 뿐인가보다. 미안하다. 내일부터 인사하는 목소리에 사랑하는 진심을 어떻게 담아야 할까, 참으로 고민 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