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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Mar 16. 2024

비웃음에 대한 단상 下

비웃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 사랑과 내적 동기

  지난 글에서 2번에 걸쳐 비웃음에 대해 다루어보았다. 자본주의 측면에서 볼 때 '비웃음'이라는 행동은 사람들이 인적자본 개발, 헬스-뷰티 경제 활성화 등을 촉진하는 훌륭한 도구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https://brunch.co.kr/@kcljh5067/231)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 측면에서 볼 때 '비웃음'은 '평등한 현대사회'에서 서열을 형성하며 서로 구별짓기, 계급짓기를 하려는 노력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https://brunch.co.kr/@kcljh5067/239)


  이번 글에서는 비웃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여기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란, 내가 타인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을 보고 비웃지 않으며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한국 사회에서 서열적이고 계급적인 모습들이 목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주장해 본다.




1. 불편해도 매일 렌즈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


  비웃음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생각할 때면 종종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불편해도 매일 렌즈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수학원을 다닐 때, 같은 소규모 수업을 듣는 여자 사람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00외고를 졸업했고 재수학원에 매일 렌즈를 끼고 왔다. 어쩌다가 안경을 낄 때면 굉장히 의기소침해하며 있었다.


  어느 하루는 궁금해서 "왜 매일 렌즈를 끼는 거야?"라고 물어보았다. 그 친구는"안경 쓴 모습이 별로여서 친구들도 렌즈 끼라고 말해. 그래서 렌즈를 끼고 다녀"라고 말했다.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비슷하게 직장을 다니면서 매일 렌즈를 끼는 동료 분들을 만났다. 전직장 부장님과 과장님의 경우도 회사에 매일 렌즈를 끼고 왔다. 눈이 붉게 충혈되었어도, "렌즈 끼는 거 불편해"라고 말했어도, 그들은 렌즈를 끼고 회사에 출근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이 안경을 끼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중요한 강사 일을 하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자를 다루는 일을 하셨다. 자신의 안경 낀 모습을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이런 모습들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내가 고도근시 고도난시로 눈이 굉장히 나쁘기 때문이다. 나는 안경을 끼면 바로 눈이 콩알만 해지고 교수님/박사님으로 변모한다. 나는 나 스스로 찐따라고 말하곤 하는데 안경을 끼면 진짜 찐따상으로 변한다. 렌즈를 끼면, 주변 사람들 10명 중 9명이 "안경 벗은 게 훨씬 낫다", "렌즈 끼고 다니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안경을 끼고 다닌다. 너무 고도근시 고도난시라서 라식/라섹 수술이 불가능하다. 렌즈삽입술이 가능하지만 수술 비용이 600만 원가량 된다고 한다. 그냥 나는 생긴 대로 살기로 했다.


  거울을 볼 때면 박사님이 앉아있어서 괴리감이 든다. 고도근시 전문점에 가서 100만 원짜리 안경을 맞췄어도 거울에 박사님이 앉아계신다. 나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렌즈를 끼며 살고 싶지 않다. 내 눈을 불편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전에 렌즈를 끼며 나를 충격적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여성 분들이셨다. 외모에 대한 사회적인 압박이 나보다 훨씬 커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지하듯, 당당히 고도근시 안경을 끼고 다니는 여성 분들도 많이 계시다.


  이 첫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무시/차별/비웃음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의 견해에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위하는 것'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외모라는 사회적 압박(peer pressure)에 의해 안경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든 비웃든 불쾌하겠지만 내가 알 빠 아니다. 당신들 거울이나 보라. 그리고 사실 타인을 비웃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미 비웃고 있는 경우가 많다.



2. 내적 동기에 따라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선택, 행동, 삶을 신뢰하고 굳건히 밀고 나가기


  최근에 한국의 한 대형로펌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로펌은 처음 방문했기에 다소 긴장되었다. 빌딩을 들어가자마자 내부의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엘리베이터에는 변호사로 보이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 맨 깔끔한 남성들이 뷰티를 뽐내고 있었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 친절히 응대해 주시는 여성 분들도 뷰티를 뽐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의 직장과 비교하며 부러움, 상대적 박탈감, 열등감 등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와 건물 좋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런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직원들의 노고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화려한 공연, 화려한 직업, 화려한 사람들 뒤에는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한 억 겹의 노력이 있는 편이다. 로펌 또한 일종의 영업 회사이라 그런 걸까, 건물에서부터 의뢰인들을 잘 대하기 위한 억 겹의 노력이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부러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나도 로스쿨을 가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현재 내적 동기를 실천하며 커리어적으로 안정화된 상태이다. NGO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내가 추구하는 비전,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진로 방황기 때보다 훨씬 단단히 다져있는 상태이다. 나는 인생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내적 동기를 좇는 삶을 살고 있기에 부러움이나 상대적 박탈감이 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선택에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종종 친구들 중에 연봉으로 나를 비웃으며 '돈 그거밖에 안 받는데 열심히 일할 필요 없지 않냐'라고 비아냥대는 친구들도 있다. 예전에는 상처받고 화났을 텐데 현재는 나를 더 알게 되고 나의 내적동기에 따라 행동하고 있어서 크게 미동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선택이니 존중해 달라고 말하고 돈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게끔 된 사실을 비판하며 선을 긋는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적 동기(돈/권력/명예/외모 등)에 동기를 찾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적 동기 : 외적 동기 비율이 20~30 : 70~80인 느낌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듯한 느낌이다. 모두 성적, 좋은 직장을 쟁취하려는 레이스에 참가하느라 자아를 찾는 과정을 유보한 느낌이다. (그리고 나중에 현타 오고...)


  나는 사람이 살면서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내적 동기 : 외적 동기 비율은 75:25인 느낌이다. 나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내가 목표로 하는 일,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감정이 팍 식어버린다.


  하지만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닫고(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추구할 때 보람을 느끼는지 등),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탐구하고, 자신만의 근육을 발전시켜 내적 동기에 따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진 차별/무시/비웃음을 타파하고,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나도 중생이라 이런 글들을 작성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도 나의 삶을 사랑하기 어렵고, 나도 나의 내적 동기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데에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2~3년 전보다 삶이 안정화되고 비웃음에 대해 초연하게 되었다. 타인을 굉장히 비웃었던 과거의 모습도 많이 누그러졌고, 타인이 나를 비웃는 것에 대해 초연하게 되기도 했다.


  사회가 좀 더 덜 서열적/계급적이고, 서로 더 사랑하고, 더 포용적인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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