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본과 3학년 때, 처음으로 '정신과학'이라는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를 듣기 전부터도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시중에 나와있는 여러 가지 책들을 읽어보고 스스로를 분석해보곤 하였다. 기본적으로 문과 성향인 나에게 '정신과학'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의대 수업은 고등학교 스케줄과 비슷하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제외하고 하루 종일 강의실에 수업을 듣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아침에 '오늘은 졸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으로 시작된 나의 하루는 여지없이 깊은 수면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신과 강의는 예외였다. 졸리기는커녕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더니, 심지어는 오후 6시에 끝나는 강의가 아쉬웠다. 조금 더 듣고 싶고, 계속 듣다 보면 인간의 신비로운 정신의 비밀에 대해서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정신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진 상태에서 정신과 실습시간이 되었다. 실습 마지막에는 자신의 자서전에 대해 정신과 교수님께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다. 모두들 이 과제에 대해 난색을 표했는데, 나는 이 과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정신과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상담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니! 그렇게 과제를 성실히 작성하고, 정신과 교수님과의 상담일이 되었다.
나의 자서전에는 나의 어린 시절, 의대를 선택하게 된 계기, 향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썼었는데, 향후 진로에 당당하게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되어, 환자를 보살피고 싶다'라고 썼다. 사실 난 정신과 교수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정신과를 하고 싶다고 하면, 내 열의에 대해 알아주시고, 뭔가 격려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거 말이다.
"자네 자서전은 잘 읽어보았네. 자서전에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보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나?"
나는 의대에 처음 오고 나서 겪었던 우울함과 그때 읽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다.
"자네는 정신과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네. 뿐만 아니라, 자서전 전체에서 모든 선택을 할 때 이성보다는 '직관'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 자네가 빵을 좋아한다고 빵집을 차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정신과 교수님께 나의 꿈이 판타지라는 이야기를 듣다니... 그때의 얼얼했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던 교수님이 많이 미웠다. 마음속으로는 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런 짧은 글로 나의 인생 전체에 대해 평가하는 거지? 란 생각으로 가득했다.
원래 맞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법.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분의 말씀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잠깐 교수님이 매정하게 느껴졌지만, 돌이켜 보면 영혼 없는 격려를 해줄 수도 있었는데, 날카로운 충고를 해주신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난 정신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정신과에서 다루는 질병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우울증 뿐만 아니라, 양극성 장애, 조현병(흔히, 정신분열병), 망상장애, 각종 인격장애, 내가 좋아했던 정신분석학까지... 내과 전문의가 되고 나서도 정신과 영역은 여전히 미지의 분야이고 막연한 동경은 여전하다. 당시의 난 정신분석학이란 정말 작은 정신과의 한 분야에 매료되어 있었고, 정신과 의사는 '철학자 + 뇌과학자 + 의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 터진 고 임세원 교수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신과는 그렇게 우아떠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임상의 최전선에서 환자들과 하염없이 부대껴야 하는 곳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 동료 정신과 선생님들 중 여러 명이 살해 위협을 받아 보았다고 한다.
상담 이후 정신과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은 내 인생의 커다란 화두가 되었다.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 이게 정말 합리적인 선택인지 최대한 많이 물어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비록 정신과 의사가 되진 못했지만, 나는 지금 내 일에 대해 정말 만족하고 사랑하고 있다. 내과 오시는 분들은 몸이 아프신 분들도 많지만, 마음도 같이 아픈 사람도 굉장히 많다. 비록 진료시간은 그렇게 길게 잡지 못하지만, 최대한 안부에 대해 묻고 환자분들 얼굴 하나하나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고맙게도 부족한 나에게 본인의 깊은 이야기를 꺼내 주시는 분들도 많아 진료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사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의 우울함, 불안함에 대해 위로받고 싶었던 거 같다. 의사가 된 이후 오히려 내가 환자분들께 치유받았음을 느낀다. 주말 동안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주말 동안 내내 기다렸다고 말해주셨던 말기암 환자분들의 '따스함', 심한 폐렴을 이겨내고 퇴원하면서 짧은 감사 편지를 받았을 때의 '짜릿함' 이 아직도 기억난다.
긴 인생을 살아본 건 아니지만, 어린 내가 원하던 길을 못 갔다고 하여도 인생 전체를 비하하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10,20대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 포레스트 검프-
지금 실패를 겪고 힘들어하고 있다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추천해 주고 싶다. 우리는 항상 인생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지금은 너무 불행한 일이, 나중에는 큰 깨달음이 될 수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