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로 시작한 불행(?)의 하루

하나의 어긋남이 하루를 다 망칠 것 같은 날

by 금팽초

때로 그런 날이 있다. 찰나의 아침, 그 짧은 순간이 오늘의 나를 몽땅 망칠 것 같은 느낌.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한참은 더 누워있고 싶지만 오늘은 고향에 내려가는 날이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여야 한다.

세수하랴 옷 입으랴 짐 챙기랴. 정신이 없다 정신이. 분명 전 날 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빠진 게 왜 이렇게 많은지.

그 와중에 또 삼식이(하루에 세끼를 다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바쁜 와 중에 냉장고에서 체리 두 알을 꺼냈다.

대충 물에 씻고 체리 하나를 입 안으로 쏙 넣었다. 깨무는 이 사이로 단맛과 상큼한 맛이 퍼졌고 딱딱한 씨도 느껴졌다. 다시 한번 더 체리를 깨무는 순간 벌어진 입 사이로 체리 과즙이 뚝 떨어졌다.

어쩐지 오늘따라 흰 옷이 입고 싶더라. 결국 배 부분에 체리물이 들어버렸다.

5분 뒤면 버스가 오는데 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거리며 옷을 벗었다. 주방 세제를 옷에 짠 후에 열심히 비볐다.

아침의 소란에 잠에서 깬 류가 세제면 다 지워질 거라며 걱정 말라는 위로가 무색할 만큼 체리물은 굳건히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나를 약 올리듯 빨간 체리물이 푸르게 변했지만 여전히 선명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흰옷은 입어서”

싱크대 앞에서 온갖 짜증을 토해내면 옷을 비비는 나에게 류는 그럴 수 있다며 결국 자리에 일어났다.

“얼른 출근해 내가 알아서 할게”


결국 퍼렇게 물든 옷은 류에게 맡기고 다른 옷을 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뛰지 말라는 류의 말에 굳이 굳이 “안 뛰면 늦는데 어떻게 안 뛰어? 지각하란 소리야?”라는 모난 말을 뱉고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류의 말을 등지고 급히 뛰어갔다.

역시나 버스는 놓쳤다. 늘 타던 버스가 가버리고 다음 차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출근길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해 또 환승해야 하는 여정이 오늘따라 더 미워진다.


다음 차에 몸을 싣고 지도 어플로 예상 도착 시간을 수십 번 계산한다. 계산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지하철역을 내려갔지만 역시나 지하철도 놓쳤다.

이 지하철을 놓치면 환승할 지하철도 놓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다음 지하철이 타고 가며 왜 흰 옷을 입고 체리를 먹었을까라는 자책을 했다. 내 마음을 멀리서도 읽었는지 귀신 같이 그럴 수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세 번 선창 하라는 류의 카톡이 왔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나는 그러면 안돼.’



이 와중에 유독 추위를 많이 타 여름에도 늘 바람막이를 챙기는데, 이것 조차 잊어버렸다. 쌀쌀한 지하철 안에서 수만 가지 자기 비하와 비난을 쏟아내며 회사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괴로워할 내가 상상되었는지, 퇴근길에 무릎 담요라도 사라는 류의 메시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직장에 도착했다.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가득했으니 오늘 하루는 망했다며 잔뜩 심통이 났다.


한 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동안 류에게 다시 카톡이 왔다.

“걱정 끝“

말끔하게 지워진 하얀 티셔츠 사진 두 장이 왔다.

바닥을 쳤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참 쉽게도 나아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하루를 망쳤다고 자책한 것이 무색할 만큼 무난하게 하루를 끝내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담요를 살까 말까 고민하며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귀향길이 추위로 가득할까 겁이 났지만 그냥 기차에 올라탔다.

웬걸? 찜통 같은 더위 때문인지 열차의 온도는 미적지근했다.

아마 바람막이를 챙겼어도 입지 않았을 것, 아니 입지 못했을 것 같은 공기였다.

찬기 없는 기차에서 오늘의 하루를 곱씹어봤다.


체리 물이 튀었지만 결국 지워졌고

지각할 것 같았지만 지각은 하지 않았고

덜덜 떨며 갈 줄 알았던 기차는 아주 쾌적한 온도였다.


크고 작은 굴곡의 순간들이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 작은 사건들이 하루 전체를 송두리째 망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침의 작은 실수가 쏘아 올린 불행들을 곱씹으며 과연 그것들을 불행이라 불러도 될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된다.

파상풍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는 스스로를 상상하며 괴로워할 필요 없다.


아침에 왔던 류의 메시지가 생각났다.

“그럴 수 있지.”

그 말처럼, 나도 조금은 나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별일인 듯, 별일 아닌 것들로 가득했던 하루.

그렇게 지나고 나니, 오히려 퍽 다정하게 느껴진다.


미적지근한 공기 속에서 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 이제 기차 탔어. 생각보다 안 춥네. 오늘 고마웠어.

덕분에, 결국 괜찮은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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