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걷잡을 수 없는 날의 밤

비싼 로션의 효능

by 금팽초

불안이라는 놈은 규칙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아무 이유 없이 불쑥 찾아와 금방 떠날 때가 있는 가하면, 갖은 애를 써도 엉덩이를 뗄 시늉 조차 하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기운이 죽죽 빠져 걸으니까 걷고 해야 하니까 하는 좀비 상태가 된다.


불안해도 내 앞가림은 해야 하는 어른이니까.


직장동료들과 실없는 농담 따먹기도 해 보고 잠잠하던 단톡에 먼저 운을 떼 기분을 환기시켜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날이다.


꾸역꾸역 맡은 하루를 끝내면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집에 도착한다.


씻지도 않은 채 방바닥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다 괜히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있는 일 없는 일까지 다 토해내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어느덧 9시에 가까워질 무렵이 되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마음에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우울은 수용성이라 물에 씻으면 내려간다지만 물을 만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버겁다.


큰맘 먹고 씻는 날이니 머리도 몸도 꼼꼼하게 씻는다.

두터운 불안까지 다 벗겨낼 요량으로 바디 스크럽도 한다.


그렇게 개운하게 몸을 씻고 나면 지친 육신과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 된다.


여기서 마무리하기에는 오늘은 지독하게 힘든 날이었으니 한 차례 과정을 더 거친다.


이런 날, 평소와 제일 다른 점이라 하면 보통날에는 쓰지 않는 값비싼 바디로션을 샤워 후에 꼼꼼히 바른다.


나의 욕실에는 늘 세네 가지 종류의 바디로션이 구비되어 있다.

최저가 순으로 산 제일 저렴한 로션 하나.

여행지에서 샀던 비싸지는 않지만 그때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로션 하나.

그리고 종류는 매번 다르지만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고가의 로션 두 종류

물론 고가라고 해봤자 몇 십만 원에 육박하는 정말 고급 바디로션은 아니고 오만 원대 정도이다.


이런 날은 비싼 로션을 골라잡아 평소와는 다른 과감한 펌핑으로 잔뜩 쏟아져 나온 로션을 온몸에 바른다.


오늘 고른 향은 복숭아향

인공적인 복숭아가 아니라 한 여름 엄마가 예쁘게 깎아 내어 준 복숭아의 냄새가 난다.


내가 복숭아인지 복숭아가 나인지 모를 정도가 되어서야 로션 바르기를 멈추고 깨끗하게 빨아둔 새 잠옷을 입는다.


한 차례의 의식 같은 시간이 끝나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불안이 싹 사라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나마 진한 복숭아향에 조금은 흐릿한 형상이 된다.


어딘가 조금은 끈적한 복숭아가 되어 이부자리에 벌러덩 눕는다.


“다음 달에 월급 들어오면 또 바디 로션 사야지.”


오늘 하루도 나 자신 정말 고생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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