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어린이는 다시 씁니다
잘못된 글짓기 교육이 아이들을 죽인다며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호소한 <이오덕의 글쓰기>에는 여러 아이들의 글을 사례로 들고 있다. 틀에 박힌 공식에 교사의 권위가 더해져 무겁게 짓누른 글들이 글짓기 대회 수상작이 되는 현실로 소개한다. 머리로 말하는 글, 남의 글을 모방한 글, 심지어 수상을 위해 찬양 일색의 유려한 글은 분명 어른이 대신 쓴 글이었다. 이오덕 선생은 삶과 생각을 키워가며 ‘마음의 숨을 쉰다는 것’이 글쓰기의 목표라고 했다. 그의 지론에 크게 공감했다.
다만 예로 든 아이들이 1990년대 초의 국민학생이었고 바로 ‘나’의 세대였다는 점에서 서글펐다.
“그랬지. 글짓기는 고된 숙제였지.”
애초에 누굴 위한 글짓기였는지 모른 채 시키니까 써냈고, 혼나고 다시 고쳐냈다. 여기에 ‘아이답게 밝고 희망차게 써야 한다’는 어른들의 선입견이 더해지니 ‘착한 어린이’가 탄생했다.
난 ‘착한 어린이’ 9910720호였다.
이오덕 선생은 글짓기의 반대편에 ‘글쓰기’를 놓는다. 정해진 설명서를 보고 레고블록 조립하듯 정형화한 글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글을 써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40여 년이 걸렸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도, 또 그만큼의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몰랐다. 회사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우연히 돌부리에 고꾸라졌을 때, 일어날 방법도 몰랐고 일으켜 줄 손길도 없다는 현실이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운 나쁘게도, 주위 모두가 로봇처럼 승진과 연봉을 향해 달리고만 있었다.
운 좋게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허우적대다 손에 닿은 것은 책이었다.
닥치는 대로 게걸스럽게 읽었다. 살아보려고.
자기 계발, 경제, 역사, 소설, 수필, 시, 철학, 청소년문학 등 졸린 눈 비벼가며 완독해 나갔고 모든 책에 대해 독후감을 쓰면서 서서히 길을 알아갔다. 어떤 부류의 책을 좋아하고 어떻게 읽고 무엇을 받아들이는지를. 2년에 걸친 다양한 경로의 시간들은 하나의 욕망을 향해 수렴되었다.
“내 글을 쓰고 싶다”
무작정 글쓰기와 관련한 책을 사들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붙잡아 둔 키워드는 대략,
‘구성, 디테일, 메모 리추얼, 관찰, 문제의식, 조사, 그리고 인내심’
특히,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서는 사진을 보고 글로 그려낸 문장들과 내공이 담긴 촌철살인의 관점을 배웠고,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에서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실전 방법론(한 주제로 원고지 800매 이상, 최소 3년, 아내에게 무시당해도 속상해하지 않기)을 배웠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가벼운 에세이로 그리면서, 언젠가 소설도 도전해 보자”
문과로 출사표도 던졌다.
올해 초 사이버 대학 진학을 결정하면서, 철학과와 문예창작과를 놓고 고민했다.
‘순도 높은 보석이 박힌 커다란 원석을 찾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원석이나 보석을 가공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먼저일까?’
아직도 비유와 대화상대가 적절했는지 모르겠지만, 상담했던 ‘이과’ 동료들은 만장일치였다.
‘당연히 가공기술이지’
나 역시,
‘머릿속에 찬란하고 장엄한 진리가 있더라도 노자, 장자처럼 홀로 깨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사상은 글로 남았지만 어렵다- ,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는 인식의 한계, 세계의 한계일 뿐이라며 냉소할지라도,
일단 쓰겠다면 나를 표현하는 것, 즉 ‘기예’로서의 언어 사용법을 배우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래서, 문예창작과 학생이 되었다.
이제, 글쓰기의 세계에 한 발 내딛는다.
누구는 뛰고, 누구는 날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음의 숨통이나 틔우자.
머릿속 뒤죽박죽 생각들을 야무지게 드러내자. 아쉬움 없이.“
나도 ‘글쓰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