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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nnjoy Oct 10. 2023

가디건

Thanks for Things(땡포띵) - 여섯 번째 물건

초여름의 북해도는 여름이라기엔 아직 서늘했다.

날씨가 추울까 혹시 몰라 챙겨간 가디건을 4일 내내 입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북해도에서의 여행은 곧 봄 치고는 쌀쌀했던 ‘그해’의 4월을 걷는 시간 여행, 일종의 회고록이 되어 많은 것들을 곱씹게 했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리 집 책장에 쌓인 먼지를 닦다 보면 늘 내 것이 아닌 물건들을 발견하곤 했다. 라이터, 가그린, 겔포스… 당신이 남기고 간 물건들로부터 시작된 상념은 기어코 옷장 한 켠에 걸린 가디건으로까지 이어져 하루 반나절을 꼭 아직 닦아내지 못한 감정 속에 살게 했다.


버리지 못한 가디건을 가지고서 서울 저 너머 눈의 섬, 북해도까지 여행을 떠났다. 눈의 섬에서 보내는 초여름과 초여름을 함께하는 봄의 기억,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에 살고 있었는지.


내 어린 마음은 북해도의 모든 풍경들을 동경하면서도 그 위에 내 기억과 바람을 멋대로 채색했다. 그해 봄에서 시작해 지금 북해도의 초여름을 걷기까지, 지난하게 이어져온 세월은 이제 보풀이 잔뜩 핀 가디건처럼 낡고 퇴색되어 내게 무료함만을 안겨주었건만,


나의 지금은 늘 무료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개중에 당신이 남긴 그리움마저 없었다면

나는 그저 평화를 가장한 권태 속에서 느리게 느리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이었을 것이다.


나는 평화를 견디지 못해,

나는 상실감으로 무료함을 잊는 우스운 인간이라

아직은 당신이 내게 남긴 상흔을 들여다보며

자꾸만 자꾸만 그해 봄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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