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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nnjoy Oct 11. 2023

라이터

Thanks for Things(땡포띵) - 일곱 번째 물건

어느 날은 집안 곳곳에 널브러진 라이터들을 정리했다. 초록색, 분홍색, 노란색, 해골 문양이 그려진 터보라이터와 하늘색 빅 라이터- 챙기는 걸 깜빡해 새로 산 것들이 몇개나 되는지, 다 모아두고 보니 수납 상자 한 개를 다 채웠다.


개중에는 분명 가스가 닳아 제 구실을 못하는 것들이 있을테지만 굳이 골라내지 않고 벽장 한 구석에 넣어버렸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제 구실을 하든 말든 별 상관 없는 물건.


다음 날 출근길을 나서며 가방에 하나쯤 굴러다닐 라이터를 찾으려 손을 넣었으나 어쩐지 집히는 게 없었다. 라이터 하나를 챙기기 위해 다시 집까지 돌아가기는 귀찮으니 근처 편의점에 들러 400원짜리 싸구려 라이터 한 개를 샀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건조한 담배에 애써 불을 지피다보니 문득-


“이리 와, 붙여줄게. 맨날 바람 불면 잘 못 붙이더라.”

내가 그렇게 예쁘게 웃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다.


“Oh, I hope candles are gonna glow in his life.”

“오, 그의 삶이 밝은 불빛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네요.“


네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뒤

나는 저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래, 한 동안은 이 사랑이 네 인생을 환히 밝혀줄 촛불이 되어주었으면 기도했다. 나는 기억과 망상 사이의 어딘가에서, 하잘 것 없는 400원짜리 라이터 불을 신성한 촛불이라 귀이 여기고 있었을지도. 구원에 갈급한 내 영혼은 꺼져가는 그 불빛 하나 지키고자 온 몸으로 바람을 막고 싶었다.


계절을 두 번 돌아, 늘 혼자였던 가을을 다시 마주하고서 깨달았다. 내 사랑은, 우리의 사랑은, 밝은 촛불이 아니라 가스가 거의 다 닳아 약한 불씨만을 남겨둔 400원짜리 싸구려 라이터 불 같은 거였구나. 그러니 언제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버려진 채 길가다가 발에 채이기도 하는, 그런 하잘 것 없는 마음이었겠구나.


그런 하잘 것 없는 마음을

나는 여태 버리지 못해 벽장 속에 꽁꽁 숨겨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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