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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un 08. 2019

맛에 충실한 삶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6월 8일, 51번째 글


어렸을 때, 몇몇 음식이 가진 맛에 환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꿀이었습니다. 꿀 자체만 따로 먹어볼 일이 없어서 엄청 맛있을 거라고 막연한 기대가 있었죠. 실제로 꿀을 먹어볼 기회가 생겼을 때, 첫 입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저 달기만 할 뿐, 어떤 특별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꿀뿐만이 아니라, 막연하게 상상하고 있던 음식을 경험할 때마다 상상과 현실의 격차가 어찌나 컸던지 실망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나이를 좀 먹고서는 그럼 그렇지 하고 그 낙차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는 실감은 나지 않지만, 적어도 현실이 기대와 다르더라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게 어른의 요건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볼 때는 정말 맛있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러다 지난주에 예비군 훈련을 다녀오며 꿀을 사 왔습니다. 면세라서 값도 싸겠다 요리를 할 때 설탕 대신 써먹으면 좋을 것 같아 이참에 하나 사두자 싶었거든요. 요리 자체를 끽해봐야 한 달에 두 어번 할까 말까 하는 걸 감안하면 충동구매였지요. 모처럼 사 왔으니 맛이나 보자 싶어 먹어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맛은 과거에 느꼈던 단맛과 다를 게 하나 없었습니다. 그저 아주 달콤할 뿐이었지요. 그렇지만 이렇게도 충실한 단맛이라니, 입안 가득히 진득하고 깊은 단이 퍼집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고 은은하게 오래도록 그 여운이 남습니다. 이런 단맛을 느껴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아주 단 걸 먹으면 입맛만 버렸다 싶은데, 꿀의 단맛은 그런 일 없이 온몸에 활력이 도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이래서 단 걸 먹는구나 깨달았죠.



요렇게 생긴 꿀입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을 먹을 맛에 집중하는 아니라 그저 먹는 행위, 보다 정확하게는 허기를 채운다는 목적에만 충실할 때가 있습니다. 식사의 즐거움이 목적이 아니라 빨리 끼니를 때워야 하니까 어떻게든 음식을 입안에 욱여넣고 서둘러 목으로 넘긴 다음, 소화를 시켜 활동할 에너지를 얻기 위함에 가깝죠. 평소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좀 맛있는 먹자고 생각할 때도 비슷합니다. 음식의 자체에 집중하고 즐기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한입에 있는 강렬한 감각을 선사할 있는 음식들, 아주 맵거나, 아주 느끼하거나, 여하간 자극적이기만 한 음식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삼양숍의 이미지를 가져왔기에 출시 할인 마크가 붙어있는 점 양해바랍니다.

'

그렇다고 먹는 사람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음식을 파는 사람도 신선도가 떨어지고 값싼 재료를 먹을만하게 만들려다 보니 온갖 조미료를 이용해 재료 자체의 흠을 숨길 수밖에 없습니다. 요리라는 게 재료의 장점을 부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런 단점을 감추려는 일환이기도 하니 무작정 나쁘다고 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에서 재료가 가진 고유한 맛을 기대할 순 없을 뿐이죠. 애초에 섬세한 맛을 가려내는 일도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지 않으면 알 수 없구요. 만드는 이도, 먹는 이도 모두가 양보할 수 있는 선에서 내놓은 결과물인 셈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평생 먹어야하고, 적어도 그 일이 고통의 연속이어서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오늘부터라도 맛을 느끼는 일에 충실해보는 거죠. 내가 입안에 넣은 이 음식이 맛을 내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지, 무엇을 이용했을지 상상해가며 최대한 열심히 그 맛을 묘사해보는 겁니다. 부드러운가 혹은 딱딱한가. 너무 질기지는 않은가. 입안에 넣고 씹었을 때부터 바로 느낄 수 있는 식감에서부터 어떤 향이 나는가, 특정한 맛을 내려고 어떤 재료를 썼는가. 보다 자세한 영역까지. 틀리면 어떻습니까. 틀렸더라도 또 배우는 게 있을 테고, 다음 번에 요리를 먹었을 때 보다 즐겁게 먹을 수 있겠죠.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의 즐거움으로서, 맛을 느끼는 일에 보다 충실하게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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