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Apr 26. 2024

네, 독한 년입니다

4화

시간이 아주 흐른 후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가장 죽일 듯이 원망스러웠던 순간은 교복 입은 어린 딸을 부모의 법적 단두대에 세워 증인으로 만든 순간이라고. 나는 증언석에서 몇 번이고 그 날 일을 이야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소리를 지른 순간을, 어머니를 밀치고 무기를 든 순간을 몇 번이고 곱씹어야 했다. 회상의 과정은 내 안의 어딘가를 고장나게 했다. 그 당시 나는 제정신일 수 없었다. 한 번은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 끝난 어둑해진 저녁에 아버지가 불쑥 나를 찾아왔다. 집으로 가는 셔틀 봉고를 모두 뒤져 기어이 날 찾아낸 아버지와 내리지 않겠다며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결국 또 지는 건 나였다. 친구들의 시선과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난 아버지의 차에 올라탔다. 강제적 자발성 납치를 당해 어느 허름한 분식집으로 가게 되었고, 나와의 마지막 연락이 “아버지가 날 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있어.”였던 어머니는 미칠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 그가 날 데려갈 만한 곳 위주로 동네를 누비고 있었다.


아버지는 도의상 김밥 한 줄과 칼국수 하나를 시켰고, 자필로 쓰여진 탄원서 한 장과 빈 용지 한 장을 동시에 내밀었다. 볼펜을 쥐어주며 나의 필체로 똑같이 베껴 적으라는 말과 함께였다. 내용은 대충 사건 당일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몸에 난 상처들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스스로 다친 것이란 거였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여지껏 자라며 내가 본 것들이 기억 왜곡이라는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나의 착각이었다기엔 매일 밤 그 날, 그 장소로 돌아가 악을 지르다 잠을 깨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날 산산이 바스라진 유리조각의 윤슬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방문을 잠그고 자다가도 옆집 도어락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고, 길을 걷다가 아버지의 차와 비슷한 SUV를 보면 동네 마트로 뛰어 들어가 숨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날의 사건은 나만의 착각 또는 상상일 수가 없었다.


목적달성에 실패한 아버지는 내게 “독한 년”이란 따가운 한 마디를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어안이 벙벙한 채 퉁퉁 불어터진 칼국수를 바라보았다. 분식집 조명은 너무 환했다. 눈치를 보며 수군대는 직원들 눈에 환히 보일 내 뒷통수가 수치스러웠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분식집을 빠져 나와 걱정 그늘을 한 가득 얹은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나는 차갑고 울퉁불퉁한 아스팔트에 그대로 주저 앉아 목 놓아 울었다. 그가 내 아버지가 되길 포기한 날은 “그날”이었지만 내가 아버지를 잃은 날은 “이날”이었다. 그 후 한참 동안 내 안을 향해 돋친 가시들이 속삭였다. 그래, 독한 년에게 따뜻한 부모란 어울리지 않지. 부모가 없는 건 네가 독한 년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슬퍼할 자격도 없는 거지. 둘을 갈라놓은 건 결국 네가 독하기 때문이었던 거지.

이전 03화 나의 아버지가 되기를 관둔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